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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Oct 05. 2024

미국집 쓰레기 이야기

강력한 터미네이터에 맞서는 법

미국 우리 집은 주거 관리 비용의 일부가 집세에 포함되어 있는 타운하우스다. 쓰레기 처리 요금도 그중 하나다. 매주 정해진 날 집 앞에 자기 몫의 쓰레기통을 내놓으면 수거차량이 와서 수거해 간다. 일명 'Trash Vallet'라 불리는 서비스로 종량제 쓰레기는 매주, 재활용 쓰레기는 격주 배출이 가능하다.



쓰레기 수거일의 풍경은 제법 볼만하다. 매주 수요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거대한 몸집의 수거 트럭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마을을 돈다. 인부의 손이 필요 없는 자동화 시스템으로 트럭 측면에 장착된 대형 후크가 집 앞 쓰레기통을 일일이 들어올려 척척 내용물을 비운다. 우리 가족은 그를 '터미네이터'라 불렀다. 터미네이터가 오는 날이면 거실 창에 쪼로로 붙어 군더더기 없는 몇 단계 동작으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그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터미네이터라도 대적할 수 없는 상대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빙'의 명목으로 우리 가족에게 떠넘겨진 이 집의 거대 폐기물이었다. 버려야 할 것들을 거실 한 구석에 쌓다 보니 금세 산 하나가 생겨났다. '산더미만 한'이란 표현이 단순한 은유가 아닌 실제가 되어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나 슬프게도 개별 가구에 부여된 쓰레기통의 크기와 용량은 일정했다. 거실을 점령한 산더미를 1/N로 쪼개 매주 부지런히 배출한다 한들, 이 집에 머물게 될 1년이란 기한 내에 과연 끝이 날 일인지는 커다란 의문이었다.




하나 분명한 건 이 거대한 쓰레기산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채 이곳에서의 소중한 1년을 보낼 순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해결책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집에서 차로 불과 15분 거리에 덤핑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땐 정말이지 너무 기뻐 눈물이 났다. 시설의 정식 명칭은 'Convenience Center', 지역 주민이기만 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벽이 낮은 시설이었다. 여권과 집 주소를 증명할 수 있는 집 계약서, 유틸리티 청구서를 꼼꼼히 챙겼다. 한껏 폐기물을 싣고 가서 다짜고짜 퇴짜를 맞아서는 안 될 테니까.



시설에 도착하자 키가 훤칠하게 큰 흑인 한 사람이 다가왔다. 트렁크 문을 열어 싣고 온 내용물을 보이자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Thank you, thank you."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우리는 무엇을 단단히 벼르고 온 사람처럼 싣고 온 물건들을 비장하게 끌어내렸다. 매트리스와 폐가구, 카드보드와 전자제품 등을 안내에 따라 각각의 수거 구역으로 내던졌다. 장난감과 책들, 문구류는 도네이션함에 따로 담겼다. 성질을 딱히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은 묻지 않고 폐기시켰다.



흑인도우미는 자기 일처럼 우리를 도왔다. 그는 힘이 어찌나 센지 무게가 상당한 나무 의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더니 허공에서 빙글, 또 빙글, 그렇게 정확히 두 번 굴리더니 폐기함에 그대로 골인시켰다.



"Can we come again? We just moved in and there's still a lot."(다시 와도 될까요? 막 이사 왔는데, 쓰레기가 아직 너무 많아서요.)

"Sure! You can come many times!"(물론이죠! 오고, 또 와도 됩니다!)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체증이 풀리고 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니! 아니, 이렇게나 쉬워도 될 일인가? 신고의 의무도, 비용의 부담도 없는, 말 그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이 땅의 덤핑 세계에 그저 경의를 표할 따름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 덤핑장에 갈 채비를 했다. 네 식구는 혼연일체가 되어 1층부터 3층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일꾼처럼 일했다. 숱한 물건을 꺼내 선별한 후에는 폐기할 물건을 차에 싣고 또 실었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 덤핑장을 오가는 일이 일상의 루틴이 되었다. 결코 의도한 바 아니지만 아이들이 미국땅에 와 등교를 시작하기까지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식당도, 공원도, 마트도 아닌 덤핑장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도록 집안 쓰레기를 내놓기까지 꼬박 2주가 걸렸다. 몇 날 며칠 덤핑에 몰두하며 통쾌감을 느끼는 동시에 심한 죄책에 시달려야 했다. 쓰레기를 배출하는 대가로 환경부담금을 지불하는 일은 어찌 보면 쉽다. 그러나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감당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덤핑장을 뒤로하던 날 나는 흑인 직원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Bye."를 외쳤다. '그동안 잘 받아주고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해요!' 하는 말을 속으로 뇌면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쓰레기 때를 한 꺼풀 벗어낸 집, 본래 품은 멋을 겨우 드러내기 시작한 이 집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나갈까. 생활의 부산물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터미네이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제로에 가까운 쓰레기로 약체에 가까운 이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강한 상대를 크게 무력화시키는 방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덤핑장을 수시로 오가며 집안 쓰레기와 함께 내면의 폐기물을 배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화려한 이국 생활을 꿈꾸며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던 허황과 과장, 욕망의 찌꺼기들을 아주 시원스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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