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쌓인 쓰레기를 걷어내다 보면 이유 없이 남의 죄값을 치르고 있다는 자각에 화가 불쑥불쑥 치솟았다. 그럼에도 온 가족이 두 팔 걷어붙이고 그 만만찮은 작업에 끝까지 몰두할 수 있었던 건 그에 대한 상응하는 대가가 때때로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해자의 숙명인 억울함과 고통을 갈음할 만한 썩 괜찮은 보상이기도 했다.
이제 와 밝히는 이야기지만 집안 공간이 영 쓸모없는 물건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건 아니다. 당장 내다 버려야 할 폐기물이 많은 경우 쓸모 있고 값나가는 물건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사전에 넘겨받은 무빙 품목 리스트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 집이 온갖 짐들과 쓰레기로 넘쳐나는 건 이전 세입자의 고의가 아닌 그들의 생활방식 탓이다'라는 남편의 초기 분석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욕실과 화장실의 위생상태는 끔찍했지만 남겨진 청소도구는 남부럽지 않게 화려했다. 4개씩이나 되는 욕실에는 저마다 넉넉한 양의 샴푸, 린스, 바디용품이 구비돼 있었다. 세탁실의 세제는 한동안 걱정 없이 쓸 양이었다. 심지어 미개봉 제품도 있었다. 한국을 뜨기 전 세제와 욕실용품을 바닥내려 용을 쓰고 세안용 비누까지 녹여 빨래를 돌렸던 게 떠올라 쓴웃음이 났다.
거라지 한편의 창고에는 테니스라켓과 아동용 골프채, 낚싯대와 그물 같은 각종 스포츠용품이 곱게 쌓여 있었다. 바비큐그릴과 캠핑용품은 이곳 야영생활의 큰 밑천이었다. 수납함에서 발견된 새 전구와 먼지 필터, 청소용 티슈는 집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 부득불 들여야 할 소모품들이었다.
또다시 돌고 돌아 주방 이야기다. 사방이 온통 기름칠 된 주방에 서자면 곧장 절망감에 사로혔지만, 그와 동시에 냉장고와 팬트리를 가득 채운 식재료와 음식이 사기를 북돋았다. 일일이 언급하긴 어렵지만 냉장고 속 김치, 고추장, 마늘, 토마토소스, 씽크대 한편의 간장, 소금, 설탕, 식초, 미림 같은 기본 양념들은 요리의 훌륭한 밑거름이었다. 주방 한쪽 수납함에 들어찬 각종 소스와 허브가루, 이국 향신료는 요리의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정리에 열을 올리다 새참 때가 되면 부침개도 부치고, 국수도 삶았다. 신라면 몇 봉을 끓여낸 날엔 가족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도 속이 헛헛하면 삼겹살도 굽고 만두도 쪄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게 우리 몫으로 남겨진 식재료로 만들어낸 음식들이었다. 그밖에 냉동실은 피자, 미트볼, 해산물, 김말이, 아이스크림 등 온갖 가공식품으로 꽉 들어차 있었는데, 그 수준이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당분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냉동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대, 한쪽 구석에 곱게 들어앉은 식재료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몇 겹이나 꽁꽁 둘린 비닐 위로는 '고춧가루'라는 네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딸내 집에 음식을 보내며 단도리를 하는 우리네 친정엄마의 필체가 틀림없었다. 이전 세입자가 물건너 올 때 어머니가 챙겨주신 것을 차마 개봉을 못한 상태였것 같았다.
마침내 그것이 우리를 살렸다. 김치는 현지 한인마트에서 사 먹으면 되겠지, 막연히 생각했는데, 정작 매대 위 김치 가격을 확인하고 보니 그것은 두 번은 사 먹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미국에 올 때 고춧가루를 챙겨 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그날 발견한 보물 덕에 그날로 신나게 김치를 담글 수 있게 됐다.
주방엔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다뤄보지 못했던 도구가 다수였다. 굳이 몇 가지 언급하자면 NINJA 믹서와 야채다지기. 다지기의 성능은 과연 듣던 대로였다. 세상에나 이 작은 기구 안에서 깐 마늘이 단숨에 갈려 나왔다. 어떤 채소를 섞어 넣어도 2초면 균일하게 갈리는 것이, 한창 어린아이 밥 지어먹일 때 이 제품을 몰랐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그밖에 무쇠주물팬과 stauv 오븐용기, 라면포트, 몇 개나 되는 새 텀플러까지. 모르긴 몰라도 이곳에서 요리의 반경을 꽤 넓힐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 집에 이런 것도 있어!" 하는 소리가 위층에서, 때로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예상 못한 진귀한 무언가가 나올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 집정리의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궂은 일이 흥미진진한 보물 찾기라 생각하자 차라리 맘이 편해졌다. 사람 맘 참 간사하기도 하지. 정리정돈과 청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뜻하지 않게 보물이 발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파도 파도 뭔가 자꾸만 나오는 것이 숨겨진 물건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날은 창고에서 점프스타터가 나왔다. 차량이 방전될 경우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라 했다. 택도 안 뗀 남방과 신발, 모자와 하의 운동복이 발견될 건 또 뭔가. 미국 올 때 옷을 몇 벌 못 챙겨 왔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사이즈가 꼭 같은 이전 안주인 덕에 나는 당장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간간이 현금이 튀어나왔고,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나던 날 선물처럼 스타벅스 금액권이 툭 떨어졌다. 마치 전쟁터에서 전리품을 줍듯 쓰레기 더미 속에서 쓸만한 것들을 건져올리며, 그렇게 '보물'의 녹을 먹어가며 우리는 한 달여에 걸친 집정리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쳤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맥시멀리스트가 분명해요"라고 우리의 사정을 전해 들은 한 지인이 꼬집어 말했다. 정확한 분석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이 집에서 영위한 삶의 방식, 그 여파로 인해 우리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동시에 그에 못지 않은 혜택을 누리는 중이다.
그들이 신청해 놓고 미처 수령 못 한 카드와 우편물이 지금도 간간이 우리 집 우편함에 담긴다. 오늘도 우리는 말없이 그것들을 처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