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현 Oct 18. 2024

미국집 빨래 이야기

Carolina Blue를 아세요?

젖은 빨래를 들고 테라스로 나간다. 겉과 속이 뒤집힌 빨래를 일일이 뒤집어 널지, 있는 그대로 말린 뒤 뒤집어 개킬지를 잠시 고민한다. 세탁기를 막 빠져나와 양면이 들러붙은 양말짝들은 하나하나 손으로 매만져 공기층을 내줘야 하는데, 그와 같은 수고가 크게 느껴진다. 모두가 테라스로 내리쬐는 강한 햇살 탓이다. 등 뒤에서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테라스의 아침 햇살이 오늘도 따갑기만 하다.



우리 가족이 자리 잡은 곳은 미국 North Carolina주에 위치한 도시 Cary이다. 날씨 좋기로 소문난 California와 같은 위도에 걸쳐 있다는 걸 얼마 전 지도를 보고서야 알았다. 이곳에 온 뒤로 나는 맑고 푸른 하늘을 원 없이 누린다.



과연 지구상에 발을 딛고 선 모든 이가 같은 하늘 아래 있노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내 나라에서 이토록 완벽한 일기를 누렸던 날이 손에 꼽았던 것 같은데. 하여 이곳에 와서 느끼는 나라 간 격차란 단순히 경제적, 사회문화적 간극이 아니요, 조금 엉뚱하게도 계절과 일기의 수준차이다. 그 간극이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곳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이 화사한 것이 더없이 좋은 일기 덕일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론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이곳의 계절을, 날씨를, 그리고 하늘을 자주 화두에 올린다. 날씨 이야기가 단순히 의례적인 인사나 말문을 트는 용도가 아니요, 대화의 본론이자 진지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새삼 알았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일인 것이다.



푸르고 청명한 NC 하늘의 색을 가리키는 말로 'NC Blue'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Carolina Blue'라고도 한단다. 그 빛깔이 파랑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이곳 하늘은 독보적인 미를 품는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말문이 턱 막히고 할 말을 잃게 되는 날이 다반사다. 깊은 하늘 우물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다. 절로 마음이 느슨해지면서 자신을 내려놓게 된다. 머릿속 총기가 빠져나가며 무언가의 시시비비를 가리던 일이 시시하게 느껴진다. 모든 일이 용서되고,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원 없이 사랑하고 싶어지는 마음. '여한이 없다'는 표현을 이와 같은 순간에 써도 되는 걸까, 나직이 읊조려 본다.






끔찍한 상태의 집이 얼마간 복구되면서 매일의 일상을 더듬어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고맙게도 아이들이 씩씩하게 학교에 적응하고 있고, 우리 부부도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간다.



태풍이 지난 뒤 그 어느 때보다 하늘이 맑아오듯, 고난의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기막힌 하늘을 보았다. 무엇이든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1년의 기한이 주는 조바심을 슬쩍 내려놓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디 새로운 곳을 가볼까' 고민하기보다, '오늘은 얼마나 맑은 하늘을 누릴 수 있을까'를 기대하게 된다.    



빨래가 쉽고 일상이 가볍다. 해가 뜨면 빨래를 널고 싶어지는 날들이 이어진다. 피부와 머릿결이 강한 햇살에 그을릴까 걱정하다가도 '아무렴 어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따사로운 볕 아래 빨래를 펼쳐 널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부가 누릴 가장 큰 호사인데.



오늘도 손목에 힘을 실어 젖은 옷가지를 팡팡 턴다. 뒤집힌 옷의 겉과 속을 바로 하고, 딱 들러붙은 양말짝도 일일이 떼내어 가면서. 마음만은 맑은 하늘 만큼이나 쾌청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