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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없이 안 될 말

김치 담그는 K- 부부

by 서지현

가족 식탁에서 김치의 위상이 날로 오르는 중이다. 가족들은 김치에 무슨 결핍이라도 든 것처럼 시종 김치를 노래했다. 아무리 노릇하게 구워진 식사빵에 근사한 토핑을 올려줘도 결국 내뱉는 말이란 '김치... 없어?' 였다. 애나 어른이나 하루이틀 김치가 떨어지면 큰일나는 줄 알고 호들갑을 떨었다.



김치에 대한 애착을 넘어 집착이 심해진 건 이곳에선 입에 맞는 김치를 수월하게 구할 수 없다자각 때문이었다. 한식의 대전제이자 터줏대감이 되어 매일의 밥상에 오르던 김치, 그 당연함 너머에 있는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게 된 탓이다.



김치에 대한 과한 애정은 비단 우리 집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같은 사연으로 미국에 건너온 한국인 지인 가정은 김치가 많이 들어가는 찌개나 김치볶음밥은 사치라며 밥상에 오르는 걸 금했다. 구운 고기에 김치 한 쪽 얹어먹는 정도만 겨우 허용한다고 했다. 미주 한인과 김치의 가치를 논하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김치란 단순한 식품이 아니요, 우리의 목숨과 직결된 존재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국땅에 김치의 주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H마트(한인마트) 매대 위에 오른 김치는 슬프게도 두 번은 사 먹기 힘든 가격이었다. 한 통 사다 시도했지만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채 김치가 물러버리는 바람에 낭패를 겪었다. 이쯤 되니 미국에서 김치 담그기는 나의 숙명이었다. 노상 친정엄마 김치만 얻어먹고 살던 반쪽짜리 주부가 드디어 제 힘으로 김치를 담가보겠다고 나섰다.



처음엔 소심하게 배추를 딱 한 포기만 샀다. 어찌어찌 인터넷 레시피를 따라 만든 김치는 썩 먹을만했다. 식구들의 칭찬과 격려에 힘입어 배추 두 포기에 도전했다. '포기라는 말은 배추 포기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명언을 가슴에 새겨가며 차차 포기 수를 늘려나갔다.



그러다 급기야 한 박스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배추 한 포기가 2만 원에 육박하는 시기, 한인마트에서 배추 10포기들이 한 박스가 $20 라는 세일가에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인데,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우리 집엔 김치냉장고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국땅에 겨우 1년 살러 온 비지팅 주제에 김장 비슷한 걸 하겠다고 겁없이 달려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따.



그날로 이웃과 배추 파티를 벌였다. 여기 저기 배추를 나누고도 양이 남았다. 김치에 쓸 배추 몇 포기만 제하고는 배추로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요리에 도전했다. 배춧국을 끓이고, 배추전을 부치고, 배추만두도 빚어가며 배추 대호강의 시절을 누렸다.






김치 담그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배추 절이기였다. 배추를 정성스럽게 절이려면 최소 대여섯 시간의 품이 드는데 직장도 뭣도 없는 우리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어 집밖으로 부지런히 나돌고 있었다.



"배추를 한 번씩 뒤집어줘야 소금간이 고루 배는데, 차에 싣고 다닐까?"

김치에 진심인 남자는 내가 농 삼아 던진 말을 진지하게 받아냈다. 굵은 소금을 끼얹은 배추 대야를 뒷 드렁크에 척 얹더니 그것을 반나절이나 차에 싣고 다니며 정성스럽게 배추를 절였다.




집김치가 떨어지지 않게 하라는 주부의 특급 사명에 위기가 왔다. 전 세입자가 고이 두고 간 고춧가루가 3개월 만에 동이 난 것이었다. 마늘 중 최고로 쳐준다는 육쪽마늘이나 질좋은 소금은 없어도 고춧가루만은 믿을만한 것을 써야만 했다.



마침 친정에서 고춧가루를 빻을 시기였다. 부모님께서 직접 농사 지어 말리신 햇고추였다. 간혹 고춧가루는 배송우려 상품으로 분류되지만 반송되는 일이 크게 없다는 걸 여러 사례로 확인했다. 몇 날 며칠 걸려 친정에서 날아온 고춧가루 3kg의 운임은 무려 8만 원이었다. 그것은 9개월 남은 우리의 미국생활과 매일의 식탁을 책임질 그 이상의 가치였다.



고춧가루를 배송받은 날 남편은 마이 프레셔스(My Precious)를 품에 꼭 안고 사진을 남겼다. 그는 장모님께 '이 귀한 걸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심 어린 카톡을 보냈다. 그 문구가 내겐 이렇게 읽혔다. '제게 생명의 동앗줄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셔서 거듭 감사합니다, K-장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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