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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Nov 06. 2019

레깅스와 크롭탑, 비키니에 익숙해질 것

늙어서도 비키니를 입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산호세의 ‘가로수길’이라 할 수 있는 산타나 로우(Santana Row)의 스테이크 집에서 점심 약속이 생겼다. 남편은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옷을 몇 번이나 들춰봤지만 마땅한 게 없다. 이런 자리가 있을 줄 알았다면 정장 원피스를 챙겨 왔을 텐데. 그중 꽃그림이 그려진 긴 원피스를 입었다. 옷도 옷인데 신발은 더 문제다. 운동화와 슬리퍼뿐이었기 때문이다.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을 수는 없으니 슬리퍼를 신었다.


‘LB 스테이크’는 산타나 로우에서 꽤 유명한 집이다. 특히 고기가 맛있다. 빵도 맛있고 함께 곁들여 먹는 버섯과 가지 구이도 맛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내 옷과 신발만 빼면 말이다.)

산타나 로우 'LB 스테이크'의 카우보이, 썸머 샐러드, 팬에 구운 버섯.


식사 자리에서 쇼핑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에 오면 다들 쇼핑을 많이 해간단다. 그러면서 몇 가지 브랜드를 콕 집어 예로 들었다. 그중 하나가 띠어리(Theory)의 캐시미어 제품. 지인은 한국에서는 못해도 3~4배는 더한다며 꼭 사가라고 했다. 여자들은 요가복계의 샤넬이라 불리는 ‘룰루레몬’ 옷도 많이 산다고 덧붙였다. 전에는 한국에 매장이 없어 직구를 해야 살 수 있는 브랜드였단다(물론 지금은 매장이 몇 개 생겼다). 룰루레몬? 나는 처음 듣는 브랜드다. 요가복계의 샤넬이면 엄청 비싸다는 거겠지?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나와 산타나 로우 거리를 구경하는데 마침 룰루레몬 매장이 있다. 이게 그 샤넬 요가복이라면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매장에 들어갔다. 가격표를 보니 가장 저렴한 레깅스가 하나에 100 불선. ‘내가 요가강사도 아니고 이 가격의 레깅스를 입긴 좀 그렇지’하는 생각을 하며 매장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 신기하게도 이곳 여성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https://shop.lululemon.com/


이곳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이 레깅스를 입고 다닌다. 지금 막 요가나 필라테스를 마치고 나온 것 같다. 처음 몇 명을 봤을 때는 근처에 요가 혹은 필라테스 학원이 있나 싶었지만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걸로 보아 운동을 하고 온 게 아니다. 그냥 평소 입는 옷이 레깅스인 거다.  그 위엔 허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크롭탑이나 탱크탑 혹은 티셔츠를 매치했다. 처음엔 Y존이 그대로 드러나는 레깅스를 보는 게 다소 어색했지만 그것도 계속 보니 편하겠다 싶은 마음이 든다.


몸매가 좋아서 입는 거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다양한 체형의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맞는 레깅스를 입고 있었다. 마르건, 키가 크건 작건, 덩치가 있건, 살이 많건 간에 말이다.  


레깅스의 종류는 정말 다양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게 있고, 발목 위에서 끝나기도 한다. 종아리 중간 길이의 짧은 것도 있다. 색과 디자인도 선택의 폭이 넓다. 검정은 기본이고, 빨간색, 파란색, 핫핑크와 심지어 샛노란 색도 있다. 단색은 그나마 평범한 편, 다양한 패턴의 레깅스가 많았다. 핸드폰은 레깅스 허리춤에 끼워 놓으면 그만이다. 여기에 눈부신 햇볕은 피하기 위한 선글라스면 오늘의 코디 끝.


한국에서도 레깅스를 많이 입긴 하지만, 요가나 필라테스를 위해 입는 옷이지 그걸 입고 가로수길을 돌아다니거나 친구를 만나러 가지는 않는다.


출처 : https://www.freepik.com/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쇼핑센터인 스탠퍼드 쇼핑몰에서 만난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의 옷차림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레깅스를 입은 사람과 짧은 팬츠를 입은 사람, 그리고 그 외에 다른 옷을 입은 사람으로 말이다. 스탠퍼드 대학교 안에서 만난 학생들의 옷차림도 마찬가지인 걸로 보아 이곳 사람들에게 레깅스는 청바지와 같은 용도인 모양이다.


놀이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인들은 대부분 레깅스와 편한 티셔츠 차림이다. 재미있는 건 아시아인은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긴소매 옷을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쓰기도 했다. 햇볕을 즐기는 사람과 햇볕을 피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놀이터는 그 장면만 보면 여기가 여름인지 가을인지 분간이 안 간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다들 그렇게 비키니를 입고 있더라. 수영장을 가거나, 바다에 가거나, 호수에 가도 다들 비키니를 입고 있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간에 말이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강가에서도 수영복 차림으로 그림을 그리던 할아버지 옆엔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나도 비키니를 입던 때가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더랬다. 배에 힘을 주면 그래도 뱃살을 감출만 하던 그때. 그러다 아이를 낳고, 남에게 보이는 몸을 인식하게 되면서는 수영복 위에 반드시 래시가드와 쇼트 팬츠를 함께 입었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휴양지에서 만난 한국 엄마들 대부분 래시가드를 입고 있다. 태양을 피하거나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한 방법이지만, 어쩐지 나는 래시가드를 입은 나보단 비키니를 입은 할머니가 더 당당해 보였다.


‘그래! 남의 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입어보자! 나도 레깅스를 입고 외출하겠어’ 하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입으려 갖고 온 요가복을 꺼내 입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입고 나가게?”

“왜~ 다들 이렇게 입고 다니던데”

“그래도 그건 아니지. 어떻게 그렇게 입고 다녀”

“왜 못 입고 다녀!”


남의 눈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옆에서 불편해하는 남편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몇 번 놀이터에 갈 때는 레깅스를 입기도 했지만 시내에 나갈 때는 나 역시 레깅스만 입는 건 아무래도 남사스럽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다 보면 내가 살고 싶은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남들 다 먹는 나이를 먹어도 별로 아쉬울 것 없을 것 같다(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또 그때 되면 어떤 생각이 들지는 나도 아직 나이가 들지 않아서 모르겠다).      

할머니가 되어도 흰머리 휘날리며 당당하게 비키니를 입고 싶다. 가슴과 뱃살의 상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바닷가에 돗자리 깔로 누워 햇볕을 즐기고 책을 보다 수영하러 바다에 뛰어드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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