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의 홈파티는 사실 조촐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시작했다. 파티의 주최자인 C씨 부부는 친하게 지내는 중국인 부부(C씨, L씨)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러다 남편과 함께 출장 와 영어공부에 빠져 있는 P씨가 그들 부부와 친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를 그 저녁자리에 초대한다.
홈파티 하루 전날, 우리 가족은 C씨 부부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회사를 다녔던 C씨는 미국에 와서도 전 회사 동료들을 살뜰히 챙겼다. 우리가 아이들과 호텔에서만 지내는 게 답답하지 않냐며 자신의 미국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우리 가족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며칠 살 수 있도록 우리 호텔과 자신들의 집을 바꿔 지내는 일종의 에어비앤비를 제안하기도 했다. 우리야 고마운 일이지만 그들을 멀쩡한 집 놔두고 호텔에서 지내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을 담아 거절했다.
그러다 내일 오후 지인들과 저녁을 먹을 예정인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가 합류하면 자리가 좀 커지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여기에 중국인 부부가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난 홍콩인 B씨를 합류시키며 최종 멤버가 확정됐다. C씨는 갑자기 커진 판에 당황했지만, 그의 아내와 나는 이미 신이 났다. 여행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언제나 설렌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휴일인 노동절 저녁 갑작스러운 홈파티가 열렸다. 음식은 각자 준비해 와서 나눠 먹기로 했다. 전날 내내 ‘이모, 이모’를 수도 없이 부르며 신나게 논 아이들은 오늘도 미국 이모네 집에 놀러 간다며 좋아했다.
L씨 집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와 함께 테이블이 준비되고 있었다. 넓은 마음으로 지인을 초대했지만 음식에는 자신이 없다는 L씨 부부는 김밥과 잡채, 모둠 전, 과일을 준비했다. 혼자인 남편의 회사 동료는 라볶이와 샐러드를 맡았다. 오랜만에 미국에서 라볶이라니! 떡볶이와 떡볶이의 친구들은 언제나 옳다.
우리 부부는 부타나베를 만들기로 했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먹기 좋으면서 전에 먹어보지 못했을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고 싶어서 고심 끝에 결정한 메뉴다. 부타나베는 숙주와 얇게 썬 돼지고기를 층층이 쌓은 뒤 청주를 부어 익힌 일본식 돼지고기 찜요리다. 미국에 재료가 있을까 싶었는데 여기도 있을 건 다 있더라. 한국 마트에서 숙주와, 대패 삼겹살, 생강을 사 왔다. 그런데 깜박하고 청주를 빼놓은 바람에 급하게 구한 화이트 와인으로 대신했다.디저트로 눈꽃 만두도 낼 예정이었으나 다들 배가 부르다며 만류했다.
소꼬리찜, 라볶이, 부타나베, 김밥, 잡채, 샐러드 등으로 차려진 한상.
중국인 부부는 함께 오는 홍콩인 B씨의 것까지 준비했다며 소꼬리찜과 볶은 돼지고기, 토마토 수프를 만들어왔다. 소꼬리찜은 중국 요리인가 보다 했는데, 조리과정을 물으니 L씨가 한국음식점에서 먹어본 음식을 재현해 본거란다. 전날 삶아 기름을 제거한 소꼬리를 인스턴트 팟(미국에서 한창 핫한 조리도구로 우리나라 슬로 쿠거와 비슷함)에 양념과 함께 넣어 45분을 끓여 완성했다고 한다. 한번 먹어본 음식을 단번에 만들어 내다니 그녀의 손은 분명 내 손과 다른 손임에 틀림없다. 소꼬리찜은 이날 메인 요리로 손색이 없었다. 볶은 돼지고기 요리와 토마토 수프 또한 맛이 아주 좋았다.
갑작스러운 조합이 모인 자리였음에도 식사 내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소개가 시작됐고, 각자 하는 일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아시아인이 느끼는 공감대가 있었다. 동양이라는 서로 이해할 만한 문화권에서 살아왔음은 우리가 함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자리에서는 당시(물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국제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홍콩 시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중국사람, 홍콩 사람이 있었고 홍콩의 상황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한국사람이 있었다. 일단 홍콩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홍콩인이지만 미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B씨는 미국 시민권과 홍콩시민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홍콩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어서 홍콩에 들어갈 때는 미국 시민권으로 들어간단다. 혹여 홍콩시민권으로 들어갔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을 보호해줄 곳이 없기 때문이란다. 홍콩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그에게 남편이 물었다. “현재 시위는 중국이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홍콩인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이법이 통과되면 반중국 인사에 대한 탄압 등으로 악용될 소지가 분명하다”고 우려했다.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그도 홍콩 시민의 행동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중국인 부부는 미국에서 생활한 지 오래된 이들이라 중국인의 입장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었다.
남편은 후에 함께 영어수업을 하는 미국인 튜터에서 들은 얘길 내게 해줬다.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과도 수업을 많이 하고 있는 미국인 튜터는 홍콩 시위에 대한 중국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단다. 그래서 중국인에게 ‘홍콩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국인 대부분은 ‘홍콩은 중국이다’라는 아주 짧은 대답으로 더 이상의 논쟁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 당국과 같은 입장이다. 그는 그 한마디에 더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고.
오래 계속된 대화의 자리가 끝나고 중국인 L씨는 내가 음식을 많이 못 먹더라며 이렇게 물었다. “원래 한국 여자들은 이렇게 조금 먹나요?” 사실 난 많이 먹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날 음식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내 서툰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그녀의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나는 온 머리의 회로를 돌리고 있었을 뿐. 그래서 그 맛있는 요리를 양껏 먹지 못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이미 나를 자주 본 한국 드라마 속 마른 한국 여자와 같다고 여기는 듯했다.
긴 저녁자리가 끝나고 중국인 부부와 홍콩인 B씨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C씨 집엔 한국인만 남았다. 그러자 첫째 아이는 ‘이제 한국 사람끼리 한국어로 대화 좀 하자’며 다들 식탁에 앉으라고 했다. 저녁 내내 영어만 들리니 알아듣지도 못하고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 말이 우스워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못다 한 한국말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