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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맘 Aug 16. 2020

소녀감성 아줌마들의 밤 산책

뉴질랜드 이민 일기 : 포썸과 별과 밤공기


저녁을 먹고 있는데 띵- 문자가 울렸다.


- 나랑 같이 저녁 산책  갈래? 우리 포썸(Possum:고양이만한 외래종 야생동물)   있을 지도 몰라~”

“물론 좋지! 지금?”


그렇게 얼결에 대니와 함께 밤 산책을 가게 되었다.


“oh my god … it’s so dark. 이렇게 어두운 길을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 늦었나?”

“크크크. 난 이게 너의 평소 저녁 루틴이거나 뭐 그런 줄 알았어. 아냐?”

“어- 아냐. 원래 이것보다는 좀 더 밝을 때 다니지. 하하. 특히 겨울엔 이 시간엔 진짜 안 나가지. 이히히”


늦은 시간에 갑자기 불러내 좀 의아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오늘 낮에 우리가 다음 주에 이사간단 소식을 듣고는 급하게 시간을 낸 듯했다. 대니는 유치원 선생님이라 평일에는 일하느라 바쁘니까…


대니와 나의 인연은 라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년간 라양이 너무 행복하게 다녔던 유치원의 담당 선생님이었던 그녀, 나는 늘 그녀를 라양의 제2의 엄마, 혹은 키위 엄마 정도로 여겨왔기에 라양이 유치원을 졸업할 때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게 가장 아쉬울 정도였다. 그런 아쉬움이 그녀에게도 전달되었는지 라양이 학교를 간 후엔 ‘내가 이젠 더 이상 라양의 선생님이 아니니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겠어~!!’라며 웃어주었던 대니. 그렇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었다.


대니는 나보다 3살이 어린 젊은 엄마인데, 우리는 공통적으로 딱 비슷한 또래의 오누이를 키우고 있어 더욱 편하게 친해질 수가 있었다. 나 역시 첫아이 출산이 빠른 편으로 어딜 가나 늘 젊은 엄마에 속하는 편이었기에 우리는 은연중 서로의 처지를 이해했던 것도 같다.


“풉...근데 있잖아…. 우리 이렇게 어두운 밤에 같이 걸으니까 나 꼭 십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야.”


시꺼먼 시골길을 아줌마 둘이 졸랑졸랑 걷는, 이 묘하게 우스운 상황에 나는 자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으하하, 너도 그래? 맞아. 나도 그래.”

“꼭 어디 학교에서 캠프 온 것 같지 않니? 나 혹시 몰라서 이것도 챙겨왔지롱. 짜잔.”


내가 준비해 간 헤드랜턴을 꺼내니 정말 캠핑 나온 십 대 소녀처럼 말갛게 웃는 대니.


“안 그래도 나 나오는데 싸이먼이(대니의 파트너이자 아이들 아빠, 역시 유치원 선생님임) 정말 이 시간에 나갈 거냐면서 미쳤냐고...크흐흐흐흐”

“푸하하. 싸이먼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다. 나 혼자였으면 무서워서 절대 못 나왔을걸 이 시간에.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것 같아”

“나도 그래. 네 덕분에 난생처음 이 시간에 걸어본다. 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소녀처럼 들떠 쉴 새 없이 재잘댔고 하늘엔 은하수가 쏟아질 듯 빛났으며 밤공기는 딱 좋게 선선했다.


떠드는 사이사이 한 번씩 말이 끊어질 때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레 주변의 밤 소음에 귀를 기울였는데. 고요하지만 힘 있게 채워지는 쏴- 쏴- 파도 소리, 그리고 때마침 장단 맞춰 옆 개울가에서 흐르는 강물 소리의 조화. 여름이었다면 풀벌레 소리 역시 가득했으려나? 아 몰랑..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참말 좋구나. 이런 낭만. 대체 얼마 만인지!


하지만 그런 낭만 사이에도 어쩔 수 없는 아줌마 본능은 둘 다 누를 수가 없어서 아이들도 데려왔으면 진짜 신나했겠다며 다음 주 중에 날씨 좋은 날 애들 데리고 한 번 더 나오자고 입을 맞추곤 씨익 웃어버렸다.









신나게 걷고 있는데 길가 옆 수풀에서 난데없이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려온 순간. 우리는 동시에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포썸인가?”


대니가 속삭였다. 나는 즉시 랜턴을 끄고 주변을 어둡게 만들었다. 우리는 소리가 들리는 수풀에 시선을 고정하고 포썸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숨죽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약 1분가량을 조용히 기다렸는데 수풀에선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날뿐 사람을 피해 잘도 숨었는지 얼굴을 내밀지 않는 포썸.(아마도)


“에이, 숨었나봐.”

“그러게. 잘 숨나 봐.”


순간 아주 어릴 때 동네에서 친구들이랑 메뚜기 잡으러 다니던 시절도 생각이 나고,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 아줌마가 되었는데도 이런 경험을 함께 해 줄 친구가 생겼다는 게 새삼 정말 소중한 기분이 들었다. 잃어버렸던 동심, 소녀감성을 제대로 일깨울 수 있었던 시간.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 이후에.. 정말 삶에 대한 시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아. 더 소중해졌어 모든 것이.”


“맞아. 삼시 세끼, 가족,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 따뜻한 집, 친구들과의 대화. 정말 충분하단 생각이 들어. 행복해지는 데 있어서.”


“내 말이.”




오늘의 대화, 밤공기, 은하수, 파도, 어둠, 그리고 우리가 나누었던 마음들.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야. 고마워 러블리 대니.



그냥 바닷가, 얼마 전 카이코우라 여행 중에 찍은. @Kaikoura, NZ






작년에 기록해 두었던 대니와의 또다른 이야기


https://brunch.co.kr/@ronge416c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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