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맘 Mar 21. 2019

넌 내 딸의 두 번째 엄마야.

뉴질랜드 시골 마을에서 아이를 '함께' 키웁니다.  


둘째 딸은 세돌 즈음 뉴질랜드에서 첫 유치원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딸내미의 유치원 담당 선생님인 D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 D는 나와 동갑이다. 나는 결혼을 일찍 한 편이라 주변에 내 또래 부모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D와 나는 똑같이 오누이 엄마인 데다 아이들 나이도 정말 몇 개월 차이로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알게 모르게 처음부터 그녀가 유독 친근했다. D는 여기식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amazing 한 선생님이다. 처음 아이가 유치원에 방문하자마자 다음 날 한국어 기본 표현들을 프린트해 가져와 내게 발음을 물어 사람을 감동시키더니, 그 이후에도 꾸준히 살뜰하게 우릴 챙겼다. 마주칠 때마다 친근하게 대화를 유도하는 건 기본이고 아주 세심한 부분까지 다 기억했다가 아이의 유치원 생활을 도왔다. 나의 모든 요구는 그 즉시 재빠르게 반영되었다. 정말 우리가 함께 협동하여 아이를 교육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고 해야 할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 느낌은 아이가 안전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어제는 또 한 번의 유치원 학부모의 밤(Family night) 행사가 있어 참석했는데 우리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생긴 날이다. 재롱잔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학부모들을 초대했으니 아이들이 늘 유치원에서 하는 간단한 춤과 노래 등을 선보이는 시간이 꼭 있는데, 우리 딸은 평소엔 잘하면서도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선 위축되는지 뒤로 빠지곤 했다. 그때마다 사실 우리보다 더 아쉬워하던 건 담당교사 D였다. 평소 아이의 씩씩하고 밝은 모습을 알기에 더욱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이 정도면 진정한 엄마 마음 아닌가? ㅜㅜ) 그런데 어제 드디어! 이 녀석이 알을 깨고 나왔다! 평소에 마오리어와 문화에 관심이 많아 관련 활동을 많이 하던 아이가 사람들 앞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마오리어로 발표를 해냈다. 뒤에서 선생님이 귀에 속삭여주는 걸 그대로 따라서 말한 것이긴 하지만 큰 목소리로 당당히 외치는 모습에 모인 사람들 모두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D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너무나 진실된 마음으로 아이를 기특해하던 그 표정. 절대 가식으로는 흉내를 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발표 시간이 끝난 후 우리와 마주치자 D는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너희 딸 정말 많이 발전하지 않았니? 처음 유치원 왔을 때 영어로 말 한마디 못했었는데 지금 얼마나 자신 있게 많은 말을 하는지 좀 봐. 너무 놀라워. 오늘 마오리어 발표도 사실 하기 직전까지도 자기는 안 한다고 빼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서니까 큰 목소리로 너무 잘하는 거야! 나 진심 울 뻔했잖아. 너희도 딸내미 하는 거 봤지?"



'와.... 나는 너의 그 말에 울 뻔했다. 대체 얼마나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면 그 모습에 울 뻔할 수 있는 거야? 부모도 아닌데?' 이 말들은 속으로 조용히 삼켰지만,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 느껴온 고마움들을 진심 담아 조용히 전했다.



"나는 종종 우리 딸의 말들에서 너의 목소릴 들어. 이 아이는 너를 통해 처음으로 새로운 언어를 배웠어. 그래서인지 너의 말투나 습관 같은 걸 그대로 흡수해서 때로 나를 웃게 만들어. 이를테면 이런 거지. 말끝마다 Aey?를 붙이는 거야. Mum, It's so hot, aey? 이런 식으로 말이야."



"아 정말? 그렇지. 내가 Ey?를 좀 자주 쓰긴 하지. 나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을 더 조심해야겠는걸."



"어. 맞아. 너 그래야 될걸?. 크크크. 어쨌든 그래서 난 사실 때론 네가 내 딸의 두 번째 엄마라고 생각해. 키위 엄마? 혹은 영어 엄마?"



"아 정말?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다니 고마워~ 후후."




딸내미는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에도 종종 그녀를 언급한다. 뭔가 궁금한 게 생겼을 때, 엄마도 모른다고 하면 나중에 킨디 가면 D한테 물어보겠다고 말하곤 한다. 딸에게 D는 좋은 친구이자 응원일 것이다. 아니 D는 우리 가족 전체에게 그런 존재다. 처음 이 마을에 오고 모든 것이 낯설 때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지지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 첫 번째 이웃일지도 모르겠다. 러닝 스토리에도 항상 우리 가족 모두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시작하는 D. 나는 이 유치원의 이런 사고방식을 정말 사랑한다. 누군가 이 마을을 먼저 떠나지 않는 한, 우리 아이와 그녀의 딸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학교에 가게 될 텐데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나서도 D와 우리가 오래도록 좋은 인연으로 남을 수 있길 바란다.


어제 유치원에서 딸내미, 한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마오리어와 영어로 발표한 자랑스러운 똥깡쥐!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알던 세상엔 이런 장면은 없었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