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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18. 2021

#40. Mini 이야기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40. Mini 이야기    


학원 앞 골목은 비교적 안전지대이다. 

사실 필리핀에 안전지대는 없다고들 하지만 여기는 우범지역은 아니다.

이런 동네에는 조그만 철창 가게들이 있다. 이걸 현지어로 ‘사리사리’라고 부른다. 

큰 마트에서 물건들을 때다가 10% 정도 이문을 붙여서 파는 구멍가게들이다. 


주로 파는 제품은 담배나 커피믹스 같은 기호식품에서 부터 음료나 과자등을 판다.

낫개로 팔 수 있는 건 전부 파는데, 예를 들면 아기들 기저귀, 문구류, 세제, 의약품, 여성용품 

담배 등을 말한다. 무론 주류도 판다. 조금 큰 곳은 안주가 될만한 음식도 조리해 준다. 

한국으로 치면 편의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학원 앞 모퉁이에는 이런 ‘사리사리 스토어’가 여러 개 있다. 

저녁 시간이 되면 가게 앞은 맥주를 마시는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된다. 

필리핀 사람들은 얼굴을 두 번만 보면 ‘프렌드’라고 부르고, 세 번째 만나면 ‘베스트 프렌드’라며 

무척 친한 척을 한다.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지만 나는 말을 섞어 보고 싶은 욕심에 그리 피하진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늦게 주전부리를 사러 나갔더니 동네 청년 5명이 맥주를 마시며 평상에 앉아 있었다. 

‘헬로’하고 인사를 하고 주전부리를 사서 돌아오는데, 이들이 덜컥 맥주잔을 내밀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걸터앉아 맥주를 마셨다. 


청년들과 주거니 받거니를 몇 번 하며 잡담을 하고 있는데 가게에서 키가 작은 예쁜 소녀가 나타났다. 

그냥 딱 봐도 예뻤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예뻤다. 그 소녀가 내 옆에 앉더니 내 맞은편 청년과 

이런저런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맞은편 청년이 갑자기 날 소녀에게 소개했다.


내가 "나이스 미츄." 했더니,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Nice me you, Sir" 했다. 

학원 수업을 오래 하다 보면 입에 붙는 신상 털기 질문들이 있다. 

적어도 열 개 정도의 기본 질문은 자동으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녀는 이름을 ‘미니(Mini)라고 했고 18세이며 가게 안쪽 방에서 남자 친구 가족과 함께 

산다고 했다. 그 가게는 남자 친구의 누나가 주인이라 했다.


내가 가게 안에 방이 몇 개냐고 물으니 안쪽에는 방이 하나라고 했다.  

거기서 몇 명이 사냐고 물으니 남자 5명 여자 2명 도합 7명이 산다고 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잠시 후 취기도 오르고 해서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기분 좋게 Bye Bye를 외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학원으로 돌아오며 미니(Mini) 생각을 했다.

“도대체 7명이 어떻게 한 방에서 살고 있는 걸까?” 



며칠 후 토요일 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게를 들렀더니 미니가 혼자 

음악을 듣고 있었다. 망설이다 그 맞은편에 앉았다. 미니는 날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맥주와 적당한 과자를 시키고 미니와 잠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미니의 집은 세부에서 차로 5시간 정도 걸리는 어촌마을이라고 했다. 

고향에서는 일자리를 못 구해 세부로 왔고 지금은 남자 친구 집에 얹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대도시인 세부에 와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다가 누군가의 소개로 

Bikini-Bar에 취직을 하게 됐고 지금은 댄서가 됐다고 한다. 


나는 ‘Bikini-Bar’라는 말을 잘못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미니는 재차 Bikini-Bar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몇 살이냐고 다시 물으니 '에잇 틴~~"이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니 당연히 댄서라고 이야기한다. 

자기는 댄서 일만 하기 때문에 수입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적다고 했다. 

필리핀에서는 18세가 되면 성인이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나는 B-Bar의 ‘댄서’라는 개념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댄서’라는 게 뭘 말하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혼란이 왔다.

남자 친구가 그 일 하는 걸 아냐고 물었더니, 소리 내 웃었다. 

남자 친구가 출퇴근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자기가 남자 친구 오토바이도 사줬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더 정리가 안 됐다.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가지 더 물었다.


- 나  : "지금은 왜? 일 안 가?" 

-미니: "지난주에 발목을 다쳤어요." 

- 나  : "춤추다 그랬어?"

-미니: "아뇨, 계단에서 넘어졌어요.(웃음)"


그러면서 발목을 보여준다. 조금 부어 있었다. 

미니는 발목 부상은 대수롭지 않아 다음 주부터 다시 일을 하러 갈 거라고 했다.


남자 친구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니 정해진 것 없이 이것저것 한다고 했다. 

가게 안에 5명의 남자들이 살고 있는데 남자들은 전부 이렇다 할 직업이 없다고 했다. 

가게에서 남자 친구 누나가 버는 돈과 미니가 벌어오는 돈으로 모두가 먹고산다는 것이다. 

어리고 예쁜 미니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말을 듣고 있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미니와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Bye Bye Sir, Sweet dream”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나도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등 뒤에 미니가 이런 말을 했다.  


“다음에 바에 한 번 오세요.” 

나는 돌아서 웃으면 손만 흔들었다. 



미니가 묵고 있는 가게 안쪽 방에는 미니와 남자 친구의 누나 그리고 친척인지 뭔지 

모를 젊은 남자들이 함께 산다. 그중 돈벌이를 하는 사람은 가게 여주인과 미니 밖에 없다. 

내가 몇 번을 물었는데 미니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리고 아주 자랑스럽게, 

“제가 번 돈으로 남자 친구 오토바이도 사줬어요.”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특히 필리핀에는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그늘에서 낮잠이나 자고 여자들이 일해서 가정을 꾸린다는 말을 떠들어 댄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저것들은 게을러서 일은 안 하고 만날 그늘에서 잠만 자..."

이건  틀린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만들어낸, 

"조선 사람은 게을러서 안 된다.", "조선인은 더럽고 지저분하다.", 

"조선인들은 당파 싸움이나 하는 몰이배들"이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헛소문 같은 말이다. 


어느 나라나 부지런한 사람이 있으면 게으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국민성은 이런 한 마디 말로 일반화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미니와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동안 내가 듣기 싫어했던 그 말, 

"게으른 열대지방 남자들"이라는 말이 미니의 상황과 너무도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남자 친구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그 공간에서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 

현재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지.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나는 'Bikini-Bar'에 대해서도 그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미니'가 비키니를 입고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다.


내게 Bar에 놀러 오라고 했을 때, 

순간 나는 "내가 Bikini-Bar 댄서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이 들의 문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미니를 보며 처음으로 '문화 차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선입견을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세상과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세상은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차이'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아무런 방법이 없다. 


'미니'는 내가 필리핀에서 본 여자 중에 가장 예쁜 사람 중 한 명이다.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데다 친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난 그녀가 일하는 가게를 가고 싶지는 않다.   

아직 그 정도까지 관점이 변하지는 않았다.


미니는 앞으로도 동네 친구 정도로 지낼 생각이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하니 바깥 산책이 낯설지 않아 좋다. 

낯선 것이 사라지는 과정이 새로운 문화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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