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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15. 2021

#39. 크리스마스 휴가

실타래의 끄트머리 찾기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39. 크리스마스 휴가    


“형 들었어요? 크리스마스 휴가가 2주일이 넘는데요.”


올해는 크리스마스가 연휴와 겹쳐 내년 초까지 2주나 쉰다고 한다. 

매년 이렇지는 않은데 올해는 대체 휴일과 크리스마스 연휴가 겹치는 바람에 휴가가 길어진 것이다.

선생들은 좋아서 입이 찢어진다. 그런데 학생들은 죽을 맛이다. 특히, 나는 더 그렇다.

딱히 수업에 들어간다고 느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수업이라도 해야 한 걸음이라도 늘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난 휴가라고 해도 별로 즐길 거리도 없다. 다른 학생들은 벌써 여행 갈 계획들을 세우고 멤버를

짜느라 난리다.


연휴 시작 전날은 오전 수업만 했다. 오후 시간에는 학원에서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여는 이런 파티에는 학생 참가율이 60%도 안 된다. 한국 학생들은 학원에서 하는 파티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편이다. 모두가 나가서 놀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학원에서는 음주가 제한되니 파티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수준이기 때문에 모두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들이나 사무실 직원들은 이런 크리스마스 파티를 무척 기다린다. 이들은 한국 학생들이 공짜로

열어주는 파티를 마다하고 나가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전 수업이 종료하자 1층 로비에 파티장이 꾸며졌다.

여자 선생들이 모두 딱딱한 학원 유니폼을 멋진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로비에는 커다란 케이크와 필리핀 전통 음식들이 차려졌고 간단한 와인도 준비 됐다. 

파티가 시작되자 프로그램에 따라 게임과 노래 댄스 경연 등이 펼쳐졌다. 

학생과 선생이 함께 하는 행사도 있었고 직원들과 도우미들이 함께 하는 공연도 있었다.


가톨릭이 국교에 가까운 필리핀에서는 크리스마스 파티는 특별한 행사일 수밖에 없다. 

또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면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된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이 파티는

송년회를 겸하게 되는 것이다. 


파티 문화에 익숙지 않아 내겐 이런 장면이 무척 생소하지만 한국에서 접하지 못하는 풍경을 

체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쉬운 점은 현지인들이 파티를 준비한 만큼 학생들도 최소한의 

의상이나 선물 등을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 학생들은 참가 숫자도 적고 관심도 보이지

않아 보고 있기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여자 선생님들이 한껏 뽐낸 예쁜 드레스를 입고 춤을 청하는데 늘어진 면티에 슬리퍼 차림으로

춤을 추는 학생들이 내 눈엔 그리 멋져 보이지 않았다. 뭔지 모를 수치심 같은 게 느껴졌다.

나의 고리타분한 기질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는 어학연수를 준비하면서 옷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행사에 참여할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긴바지에 발가락이 보이지 않는 신발 정도는 있었기에 옷 중에 가장 

격식에 맞는 옷을 입고 파티에 참가했다. 1:1 선생인 제니스 선생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제니스 선생이 무척 좋아했다. 나도 흥겨웠다.


파티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허전했다.

"앞으로 2주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14일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뭔가 하나쯤 끝낼 수 있는 시간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알차게 연휴 기간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별로 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눕자 얼마 안 마신 와인이 나를 꿈속으로 이끌었다.


다음 날 아침에 식당에 갔더니 하나가 혼자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모두들 여행을 떠나거나 외출을 해서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    : 연휴 시작인데 지금부터 뭐 할 생각이냐?

하나 : 저는 영화나 보면서 학원에 있을 생각이에요. 아저씨는 뭐 하실 거예요?

나    : 나도 아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나 : 그럼 오늘은 저하고 이거나 같이 봐요.

나    : 뭐 보는데?


그날 하나가 보여준 영상은 다큐멘터리였다.

고층빌딩을 지을 수 있게 설계 방식을 고안해 낸 건축가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었는데, 

주로 다룬 내용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건축 과정이었다.


예전에 고층 빌딩을 만들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둥이 무게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둥에 철근을 넣는 공법을 발견하기 전 까지는 3층 이상의 건물을 짓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근을 뼈대로 하는 기둥을 생각해 냄으로써 고층빌딩을 만들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영상을 다 보고 방으로 내려오면서 연휴 때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나는 2주간 문법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상효 선생의 "Grammar in Use" 강좌는 문법(어법)이 언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려준 

내겐 영어의 철근 같은 강좌였다. 이 강좌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아직도 유튜브에서 

"영어 잘하는 법" 같은 동영상이나 쫓아다니며 좌절 속에 살고 있았을 것이다.


이번 2주의 휴가는 “박상효 선생”과 한 번 더 사랑에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문법’은 철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근을 더 강화하한 다고 예쁜 집이 되지는 

않겠지만 집이 더 튼튼해지기는 할 것이다. 


살다 보면 가끔 내 의지에 관계없이 고정된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학교나 군대처럼 기간이 정해진 시간을 말한다. 

그 시간들은 내 의지에 관계없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 시간에는 의미 있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시간들을 우리는 "때운다"라고 표현한다.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둥둥 떠있는 시간에서  한 끄트머리를 잘 뽑아내 실타래를 만들 수 있다면 

그 시간은 큰 의미가 될 것이다. 내게 주어진 2주의 시간 동안 실타래의 끄트머리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럴 수 있다면 조금은 뿌듯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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