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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14. 2021

#38. 두 번째 문장 노트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38. 두 번째 문장 노트    


문장 노트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프랭크 선생의 조언 때문이었다.

“단어를 어떻게 외우냐?”는 나의 질문에 “단어를 왜 외우냐?”는 프랭크 선생의 뜬금없는 

대답이 내 ‘문장 노트’의 시발점이었다.


처음 학원 생활을 시작할 때 유명하다는 ‘영어 공부법’을 이것저것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영화 or 드라마”로 하는 공부법이었다. 자막 없이 보거나, 

영어 자막만 보거나, 한영 자막을 동시에 띄워 놓고 보거나, 영어 자막을 필사까지 해봤다. 

그런데 모두 실패했다. 


일상에서 많이 쓸 거 같은 시트콤의 대화도 나의 생활에서는 별로 쓸 일이 없었고, 

같은 영화를 100번쯤 보면 대사가 외워지고, 그 대사가 완벽히 외워지면 실제 영어 실력이 

급상승한다는 말을 듣고 30번 넘게 한 영화를 본 적도 있었다. 이것도 결국 실패했다. 

암기되는 속도보다 잊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러니 이런 방법들은 생활 영어에 큰 도움이 안 됐다. 

또한 같은 영화를 공부를 위해서 계속 보는 건 정말 지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재밌는 영화를 골라서

보면 나 같은 경우는 영어 대화 보다 영화에 더 깊이 빠져 공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든 공부법은 ‘외우기’ 과정이 필수인데 선천적으로 암기력이 떨어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의 공부법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한 셈이었다. 헛발질을 하는 것인지 끈기가 없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하나씩 실패를 할 때마다 의욕은 상실되고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져만 갔다.      


내가 실패했던 모든 방법들이 조금씩 내 몸속에 축적되어 실력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누군가 했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고 힘이 나는 건 아니었다. 이때쯤 프랭크 선생으로부터 “문장으로 단어를 외우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건 이미 내가 하고 있던 방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룹 수업을 하다 보면 끼어들고 싶을 때 못 끼어들어 애가 탈 때가 많았다. 수업에 참여를 못 하고 

계속 겉돌고만 있으니 답답해서 한글로 내가 할 말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수업이 무르익으면 영어 

공부보다 때로는 주제에 집중해서 수업이 진행될 때가 많다. 인종, 난민, 종교, 환경, 연애, 결혼, 이혼, 

정치, 경제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흘러 다닌다.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가치관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어 수준 높은 토론이 이어지며 

수업의 질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나는 영어로는 이런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어 한글로 내 생각을 적었다. 


“아하, 내 생각은 이런데 이건 어떻게 말해야 하지”라며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메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대화가 빨리 진행되어 못 알아들을 때는 학우들에게 물어서 핵심을 메모했다. 

대화에 참여 못 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나는 이런 주장을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한글로 

메모를 한 것이다. 이런 수업은 대화에 끼어들지 못해도 주제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무척 재미있다.


수업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면 오늘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짧은 한국어 문장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짧은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다시 만들었다. “Grammar in Use"를 조금은 공부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충 ‘주어+동사’로 이루어진 짧은 단문 정도로 문장을 만들어 노트에 적을 수는 있었다. 

한글도 단문 영어도 단문 무조건 단문으로만 정리를 하니 딱히 어렵진 않았다.


기분이 내키지 않는 날에는 안 할 때도 있었지만 하루에 한두 문장씩은 꼭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을 말하지 못해서 미칠 만큼 답답한 일이 한 번 이상은 꼭 생겼기 때문이다. 

프랭크의 말처럼 답답한 상황에서 외웠던 단어와 문장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런 문장들은 한 번만 봐도 기억에 남았고 이렇게 각인된 문장은 실전에서 쉽게 튀어나왔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단어는 문장으로 외워야 한다.”라는 프랭크 선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게 '영어 공부'는 정말 어렵고 짜증 나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 짜증이 '공부’라는 것을 하게 만들었다. 

실생활에서 말을 못 해 생기는 불편함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손짓 발짓으로

대화는 가능하지만 멋진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때의 뿌듯함은 또 다른 쾌감이었다.


어쨌든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첫 번째 문장 노트의 마지막 장을 채웠다.

영어보다 한글이 더 많아 영어 노트가 맞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뭔가 하나 끝냈다는 것은 내 영어 공부에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일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씩 앞으로 가는 것이 맞나?" 하는 의심이 자꾸 든다. 


솔직히 힘들다기보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 같다. 

끝에 아무것도 없을까 싶은 것에 대한 두려움.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거나 주저앉을 생각은 없다. 

이 정도 노력도 해보지 않고 세상을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이 노트들은 내가 이 시간 이곳에 있었다는 걸 증명한다.

 훗날 오늘이 생각날 수 있는 일 한둘 만들어 두면 좋다는 생각이다. 

10년쯤 뒤, 노트를 볼 수 있기 바라며  첫 번째 노트를 닫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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