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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12. 2021

#37. E.O.P  

English Only Person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37. E.O.P (English Only Person)


학원 생활이 길어지자 함께 수업해 본 사람들의 숫자가 꽤 늘어났다.
이건 학원에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오늘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옆자리에 예전에 함께 수업을 받던 친구가 앉았다.

그 친구 목에 [E.O.P]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진 않았지만 모르는 안면이

아니니 영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학원에는 E.O.P.(English Only Person)라는 제도가 있다.
쉽게 말해 “영어만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핏 듣기엔 우스워 보이지만 나름 괜찮은 공부법이다.
학생들이 평소에 한국말만 쓰니 학원 측에서 고육지책으로 만들어낸 생활영어 공부 방식인 것이다.


E.O.P가 하고 싶으면 사무실에 신청해서 표찰 같은 목걸이를 받으면 된다.
별다른 어려운 절차 없이 할 수 있다. 이걸 받은 사람은 온종일 목에 걸고 다니면서 영어만 써야 한다.

E.O.P 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도 영어만 말하는 게 예의다. 그런데 영어를 잘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한국말로 해야 하니, 목걸이를 한 사람은 영어로 말하고 상대방은 한국말로 하는 어색한 경우가 생긴다.

이런 장면을 옆에서 보면 좀 웃길 때도 있지만 E.O.P 방식의 공부법이 나쁜 거 같지는 않다.

E.O.P 목걸이를 걸고 다니면 선생님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모두 응원을 해 준다.

그러니 학생들 입장에서는 한 번쯤 도전해 볼만한 과제이다.

처음 E.O.P 표찰을 달고 있는 학생들을 봤을 때 매니저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    : E.O.P 저거 달고 있는 애들은 다 영어 잘하는 애들인가?

-매니저 : 꼭 그렇지도 않아요.

-나 : 어쨌든 할 만하니까 달고 있는 거잖아.


-매니저 : 주로 졸업 가까운 애들이 많이 해요. 

'남은 동안 열심히 해보자', 뭐 그런 뜻에서 하는 거죠. 

평소에는 만날 놀다가 학원 끝날 때 되니까 급해져서 이거라도 

해보자 하고 다는 애들이 많죠.


- 나     : 그래도 저거하고 있으면 공부에 도움은 많이 될 거 같은데?

- 매니저 : 도움이야 되겠지만 저게 쉽지가 않아요. 

말 못 하는 고통이 생각보다 크거든요. 저 목걸이 하고 있으면 말 거는 

쪽에서도 영어로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말을 잘 안 걸어요. 말을 걸어도도 길게 하기가 쉽지 않고요. 

형님도 E.O.P 한번 해보고 싶으세요?

- 나   : 아니, 생각 없어.


-매니저 : 형님은 좀 더 있다가 하세요. 지금 하면 역효과 생길 수도 있어요.

나 : 알아….


나는 E.O.P를 2~3일 이상 하는 학생을 별로 못 봤다. 

길게 했다는 학생들도 낮에는 목걸이를 하고 있다가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에는 

목걸이를 벗는 편법으로 겨우 일주일 정도를 버티는 것 같았다. 

내가 본 중 E.O.P. 를 제대로 한 사람은 미국에서 역(逆) 연수를 온 ‘지나’ 밖에 없었던 듯하다.

지나는 거의 석 달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 목걸이를 목에 하고 다녔고 방과 후에도 하루도

빼지 않고 이걸 착용하고 다녔다.


한국에서 처음에 학원을 알아볼 때 “스파르타”니 “외국인 학생 비율이 90%”니 하는 광고들을

본 적이 있다. 처음 어학연수를 계획할 때 상담해준 후배의 말에 따르면 굳이 그런 곳은 가지

말라고 했다. 특히, 나 같이 영어에 ‘영’자도 모르는 초보자는 절대 그런데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   : 왜? 나도 그러데 가서 짧게 바짝 해서 잘하고 싶은데.

-후배 : 형님, 영어가 그렇게 바짝 해서 되는 거 같으면 누가 못해요. 

그냥 쉬엄쉬엄하세요. 쉬었다 온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게 훨씬 나아요.


-나   : 그래도 그렇게 하드 트레이닝으로 조이면 효과가 좋지 않을까?

-후배 : 성공하면 좋기야 하겠죠. 그런데 그게 쉽겠어요? 

솔직히 어학연수 간 사람 중에 ‘성공(?)’이라 할 만큼 공부하고 오는 사람이 

10%도 안 된데요. ‘성공’이 뭐냐에 따라 다른 거지만 형님 같은 자유로운 영혼은

'스파르타'하곤 안 맞아요. 영어 공부를 왜 수도승처럼 해요.

그러다 우울증 걸리기 딱, 좋아요. 


 거기서 하드 트레이닝해서 될 애들은 한국에서도 다 될 애들이에요. 

그러니 가서는 맘 편히 쉬면서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하는 게 더 나아요. 


-나   : 알았어..


당시에는 이 말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 말이 틀려 보이진 않았다.


며칠 후 옥상 휴게실에서 그때 E.O.P를 달고 있던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날은 표찰이  없었다.


-나   : 어? E.O.P 없어졌네.

-E.O.P : 며칠 해 보니까 그거 못하겠더라고요.

-나   : 왜? 열심히 한 번 해보지.

-E.O.P : 그게 나만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말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잘해줘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니 하나 마나예요. 

내가 틀리게 말해도 그걸 틀렸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하고요. 

너무 지적을 많이 해서 아예 말도 못 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요. 


-나    : 그래도 도움은 됐을 것 같은데.

-E.O.P : 모르겠어요. 말 못 하는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크던데요. 

E.O.P 해보니까, 문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겠더라고요. 

단어 더 외우고 문법 공부 더 열심히 하려고요. 

문법 공부를 하면 그래도 뭔가 느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나    : 음....(그건 그냥 한국에서 공부하는 방법이잖아.)


그 친구와 헤어져 오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영어 관련 충고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걸 알게 됐다.

꼰대 버릇이 나오려는 것이다. 다행히 한 마디도 안 하고 돌아섰지만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인간은  다들 다르게 생겨 먹었고 공부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그러니 자신에게 맞는 공부 방법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방식대로 나는 나는 내 방식대로 하면 된다.  


내가 경험한 '실패'는 방법의 잘못 보다는 '꾸준함'의 부족에서 온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시간의 낭비는 일을 시작하고 난 후 보다, 일을 시작할까 말까 망설일 때 더 많았던 듯했다.


그러니 일단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 보고 이 방법이 실패면 "실패했구나~!" 인정하고

그때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해도 어쨌든 한 만큼은 이익이라는 믿느니 것이다.

"하다가 멈추면 아니한 만 못하다." 이런 말 나는 믿지 않는다. 

"하다가 멈추면 한 만큼 이익"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멈추는 타이밍인데 그건 살면서 익혀야 할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문장 노트를 만들고 있고, 소리 내서 읽기 연습을 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프랭크 선생의 수업까지 

빠지지 않고 들어가고 있으며, 틈틈이 마이마이와 대화를 하고, 마이클과 티타임 시간을 만들어 

잡담을 하고, 넬리아 팀과 놀러 다니고 있다. 


나는 현재의 내 공부법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일단은 그대로 가기로 한다. 

E.O.P는 좀 더 지나고 생각해 볼 것이다.


그래도 졸업 전에 한 번쯤은 E.O.P 목걸이를 걸어보고 싶긴 하다.   

“English Only Person”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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