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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Jun 09. 2021

#35. Love line...(5부)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35. Love line...(5부)


우리는 아무도 없는 휴게실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웃으며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아마도 내 웃음이 무척 가식적이었을 것이다.


“아저씨한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하면서 말을 꺼낸다.  

“뭘?”하고 시치미를 떼자, 또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파티 있은 뒤로 아저씨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한다.


“서로 바빠서 그렇지 뭐.”하고 나는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학원에서 바쁠 일이 뭐가 있나, 매일 똑같은 일상인데.


“탐, 오빠하고는 그냥 만나는 거예요.

별 다른 관계 아니에요.”한다.


나는,

“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던데?

왜, 그런 거지 같은 놈하고 만나고 다니는 거야?”


“너도 봤잖아 3층 복도에 쓰러져 있던 날, 넌 눈이 없냐? 귀가 없냐?

도대체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고 만나고 다니냐?”


“똑똑하게 생겨가지고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다녀?”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던지 학원을 옮기던지 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입에서는

“공부 열심히 하고 탐하고 잘 사귀어, 실수하지 말고, 알았지?”

이 따위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 이상한 실수 하지 마. 

큰일 날 짓 하고 다니지 말라고. 알았어?"하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네, 걱정 마세요. 저 그렇게 바보 아니에요."라며 웃는다.


속에서는 할 말이 봇물처럼 솟아났지만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나가 “왜요?”하며 의아하게 쳐다보며 묻는다.

나는 “악수 한 번 해.” 했다. 하나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Thanks a lot”이라고 하자,

“Why?”하고 묻는다.

나는 “I just wanna hold your hand.”라고 비틀스의 노래를 흉내 내서 대답했다.


그랬더니 “What?!!!” 하더니 웃으며 내 손을 꼭 쥐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냥, 아저씨한테 뭔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라고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하고 물었더니,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런 생각했다니 고마운데"라고 했더니,

"그런데 말을 하려고 보니 아저씨가 계속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나 찾아온 거야?” 

“네, 아저씨는 수업 없는 날도 아침 식사 일찍 하시잖아요.”


“어이쿠, 똑똑하네.” 

“저 똑똑하다니까요...ㅎㅎㅎㅎ...”


하나가 예의 그 시원한 웃음을 웃길래 나도 따라 웃었다.


“나 가봐야 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Where are you going now?”하고 묻는다.


“I’m busy. I have a date this morning.

Somebody waiting me outside now.

You cannot believe. Really, beautiful.”라고 

나는 과장되게 어깨 짓을 하며 말했다.


그랬더니 “Wow~ You lucky, 

Enjoy. Have nice day!!.."라고 하나가 명랑하게 대답했다.


나는 환하게 웃는 하나의 얼굴을 보며 손을 흔들고 식당을 나왔다.

하나가 내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Thank you~~"   


그날은 20분을 넘게 걸어서 워터프런트 수영장까지 갔다. 

수영장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빈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날은 물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수건을 깔고 수영장 비치베드에 누워서 하늘만 바라봤다.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의 지질한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내가 결혼을 조금만 빨리 했어도 하나 또래의 딸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다.


외로움에 찌들어 있을 때 하나가 뭔가 반짝이는 설렘을 준 것은 사실이다. 

내 감정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건 애정이나 욕정 같은 것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털이 보송보송한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변명 같지만 실제로 내 감정은 그랬다.


그런데 이상한 녀석이 나타나서 내 강아지를 가로 체 갔다.

그놈은 꼭 도둑놈 같이 생긴 녀석이고 행동도 그렇게 하는 놈이다.

"하나같이 똑똑한 애가 왜, 그런 녀석 하고 엮이게 됐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게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그날 수영장에 비친 구름을 보다가 문득 나는 탐이 3층 여학생 기숙사 

복도에 쓰러져 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왜, 하나가 거기 있었을까?"  

"하나는 왜, 경비에게 바로 가지 않고 굳이 내게 도움을 청했을까?" 

"그 녀석은 그날 팬티만 입고 3층 여학생 기숙사에 샤워실 앞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럼 그 녀석 옷은 어디 있을까?" 

"4층 남자 기숙사 자기 방에서부터 옷을 벗고 3층으로 내려왔을까?" 

"샤워를 할 생각이었다면 4층에서 하면 되는데, 왜 굳이 3층으로 내려왔을까?"

그리고, 

"하나는 어떻게 알고 샤워실 앞에 있었을까?" 

이런 의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수영장의 물속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멈췄다.

궁금증은 더 큰 오해만 만들 뿐이다. 어차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확인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왜, 우리나라 딸들은 항상 그런 놈들만 고르지?”라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드라마 대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대사를 하고 있는 내가 웃겼다.


하나는 내게 굳이 뭘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우린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내가 지질하게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날 찾아와 예의를 갖춰준 하나가 고마웠다. 

그건 매우 어른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사과의 뜻으로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나이는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음을 또 한 번 느낀다.

하나가 나를 찾아준 덕분에 나는 더 이상 하나를 피하지 않게 됐고 지질한 행동도 멈출 수 있게 됐다.

세월이 흐른 후 하나는 세부에서의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머릿속에 내 이름이 남기는 할까? 아마도 금방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하나의 이름과  모습을  잊을 것이다.


나는 모든 인연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쉽게 사람과 친하지 못한다.

하지만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소중한 인연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때문이다.


추억은 망각의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부유물 같은 거다.

대부분의 기억은 가라앉고 자극적이었던 것들만 물 밖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물 밖에 드러난 그 부유물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추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 덕분에 조금은 덜 추한 모습으로 망각의 바다 위에 떠있을 수 있게 됐다.

오랫동안 ‘하나’는 세부에서 만난 멋진 여인으로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혼자 노래 연습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 시츄 같은 강아지가 한 마리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기분 나쁜 것은 스캇이 나만 보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묘한 눈초리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 이런 말을 한다.


“제가 누워서 천리를 봅니다...ㅋㅋㅋㅋ.”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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