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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이 Nov 19. 2024

인연의 점

[19-VIII-72 #229]김환기

인연의 점

 



  푸른 점화는 바다의 수면을 닮아있었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컬렉션에선 단연 김환기 작가의 그림이 화제였다. 파랑으로 가득한 이 작품을 실제 마주하니 푸른 점만큼이나 돋보이는 것은 켜켜이 쌓인 듯한 흰 여백들이었다. 해가 뜨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다의 수면이다. 수면에 무수히 반짝이는 빛은 각각이 산란하는 점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푸른 바다가 햇빛을 만나 뿜어내는 알알한 보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은은한 빛에 반짝이는 고요한 바다를 닮았다. 김환기 작가는 화폭에 가득히 점을 찍으며 그를 스쳐가고 그에게 닿았던 인연들을 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의도처럼 이 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고 스쳐가는 수많은 우리의 인연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인연들은 한낱의 순간만을 공유하고 한편 떨어져 있다가 다시 재회를 하는가 하면 계속해서 멀어지는 인연이 되기도 한다. 반면 짙어지는 색처럼 깊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관계의 인연이 되기도 한다. 아기를 품에 안은 후 나는 아기와 나의 인연이 계속해서 짙어질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작품 19-VIII-72 #229 Work 19-VIII-72 #229김환가, 1972, 리움미술관 소장


  내가 처음으로 간 장례식은 제자의 문자를 받고 간 장례식이었다. 나는 공무원이 되기 전 십여 년간 영어강사생활을 했다. 십여 년 동안 많은 학부모님과 학생들을 만났지만 이 제자는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미안함과 애착을 가진 ‘아픈 손가락’의 학생이다. 이 제자의 어머님은 몇 년간의 암투병을 하셨다. 몸이 아프신 와중에도 내가 상담전화를 할 때면 귀 기울여 들으시고 온화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잘 봐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말로 정말 믿고 맡겨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머님의 바람만큼 내가 잘하지 못했다는 죄송함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간 장례식장안에 들어서자 상복을 입고 선 열일곱의 어린 제자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터져 오히려 담담해 보인 제자에게 위로를 받을 정도였다.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 있었기에 그래도 다행이라고 말했던 그의 얼굴의 두 눈이 떠오른다. 그 눈은 어머님의 눈과 참 닮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닮은 두 눈을 보며 먼저 떠난 이를 추억할 수 있을까. 나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계속해서 괜찮다고 했던 제자는 정말로 괜찮았을까. 당연히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먼저 세상에 떠나보내는 슬픔은 괜찮지 않았다. 장례식 이후 제자는 잦은 지각은 물론이고 결석도 많았으며 그를 염려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그가 어울리는 친구들 또한 이전과는 다르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어머님의 투병 때부터 부재 이후에도 이어진 그 방황들에 난 그 방황이 참 오래간다,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짧디 짧은 기간이다. 내가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쉽게 나아질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일 것이다. 언젠가 “선생님이 제 마음을 알아요?” 혼잣말하듯 내뱉었던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그 고통을 나는 쉽사리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식을 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아픈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일 것 같지만 온전히 떠나보내는 것은 나락보다도 더 깊은 곳에 떨어지는 느낌이지 않을까.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김환기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가 썼다는 일기 속 한 문장이 그나마 사별의 지독한 슬픔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일 듯하다. 딸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 학생이 종종 떠오른다. 짙어지는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의 점, 이 순간을 이어가지 못한 제자의 삶이 새삼 떠오르며 뒤늦게 그 안타까움에 가슴이 울렁인다. 이제 제자는 군인이 되었고 난 얼마 전 그와 연락하며 ‘너는 꼭 잘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다.


 ‘선생님의 아픈 손가락은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런 고통을 지금까지 나의 제자는 잘 버텨왔고 그의 메시지는 내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주기도 했다. 내 마음 속 한켠의 푸르른 작은 점으로 남아있을 한 인연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같은 농도의 색이 되지는 않지만 소중한 사람들의 색만큼은 함께 짙어져 가길 소망한다.  나의 삶에 파랑을 안고 찾아와준 수많은 인연들과 비어있는 여백을 채워줄 인연들이 더욱 아름다운 바다의 색으로 물들 수 있길 바란다. 가족이라는 인연, 나와 아기의 점은 아기가 자라남에 따라 때론 뭉쳐지고 흩어졌다가 옅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같은 농도를 띌 수 있기를. 우리의 푸른 점이 손을 잡고 함께 짙어져 가는 매 순간에 감사하며 오래도록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푸르른 면과 같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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