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세 시기] 구스타프 클림트
우리의 시기
매일 아침 9시 25분경. 이쯤부터 아기와 나는 몇 시간 동안 서로의 부재 안에서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난 아기가 노란 등원차량을 타고 떠나면 멀리 큰길 횡단보도를 건너 노란색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기가 어린이집을 다닌 지 석 달이 지났다. 어느덧 딸은 어린이집을 다니는 것을 하루 일과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고 방학기간과 같이 장기간 동안 어린이집을 안 가게 되면 먼저 가방을 들고 나올 정도로 그곳을 좋아하기도 한다. 삼시 세끼, 하루 두 번의 산책, 낮잠 등의 하루 24시간을 공유하던 일상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아기와의 애착이나 아기의 기질상, 어린이집 생활에 금방 적응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사실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역시나 아기는 바로 적응을 했고 첫 등원의 바로 다음 날부터 차량을 이용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아기가 노란 등원차량을 혼자 타고 가는 날, 역시 내 아기는 씩씩하게도 울지 않았다. 씩씩하지 못했던 건 의외로 나였다. 점점 멀어지는 노란색을 보며 눈물이 났던 건 그것이 아기와 나의 첫 이별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아기를 처음으로 사회에 내보내며 독립을 하는 과정이었기에 일상의 공유에서 각자의 공백이 생긴다는 것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새로운 일상이었다. 아기의 독립에 대한 감정은 뿌듯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가져왔고 그 감정들에 나는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바라보는 건 엄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내 곁을 잘 떠나고 있는지,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 자식의 독립을 지켜보는 일을 나 역시 평생 해나가야 한다.
이어질 몇 시간의 이별을 아는지 딸은 등원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항상 안아달라고 한다. 나 또한 아기를 맘껏 안아주다가 보내고 싶어 코트로 아기를 감싸 따뜻하게 안아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눈부신 햇볕을 쬐며 아기를 안고 있자면 이따금 클림트의 그림처럼 우리 둘만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흥미롭게도 이 그림은 <여성의 세 시기>라는 원본 작품이 있지만 세 시기 중 앞선 두 시기인 '새 생명의 탄생'과 '현재를 살아가는 여인'으로서의 모습이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엄마와 아기>라는 부제로 알려져 있다. 금발에 호화로이 장식된 은은한 백색의 꽃들과 아기의 등 뒤까지 이어지는 초록의 잎들은 그들의 순간을 영원한 봄처럼 보이게 해 준다. 발그레한 볼과 곤히 감긴 두 눈으로 엄마의 가슴팍에 안긴 조그마한 아기와 부드럽게 팔로 아기를 감싼 엄마, 그 다정함은 그들을 감싼 봄의 기운보다도 따스하다.
아기가 최근 자주 감기에 걸렸는데 그중 한 번은 열이 꽤 올랐다. 난 밤새 아기의 열을 확인해야 하기에 얕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 긴 새벽의 어느 순간, 갑자기 아기가 내 몸에 올라타 엎드리며 누웠다. 열 때문에 몸이 아픈 걸 느꼈는지 아기는 자는 와중에 나와 몸을 최대한 밀착하고자 일명 ‘배침대’ 자세로 안겨 왔다. 돌 전후까지도 이렇게 내 배에 엎드려 잠을 자던 아기. 이제 딸아이는 이전에 배침대를 해줄 때보다 제법 묵직하고 다리도 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난 아기가 혹여 불편할까 봐 양팔로 감싸 안았다. 두 돌이 넘은 아기를 오랜만에 배침대로 안고 재우니 매일 몇 번씩이나 수없이 이렇게 밀착하여 안았던 이전의 기억들이 스쳐가 난 숨이 막히도록 행복했다.
‘너는 이만큼이나 컸구나, 그래도 여전히 너는 나의 아기구나.’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친구들과도 제법 잘 어울리고 선생님과도 애착이 생기며 아기는 어엿한 사회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품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했다. 클림트의 <엄마와 아기>처럼 난 소중한 딸아이를 안고 꽃으로 가득한 기쁨을 누렸다.
이토록 포근한 엄마와 아기의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클림트의 <여성의 세 시기>처럼 여성에겐 세 시기가 존재한다. 클림트는 여성의 탄생과 현재를 살아가는 여인, 그리고 나이 든 여인의 모습으로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내 딸아이는 탄생의 시기를 지나고 있고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엄마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리고 클림트의 그림처럼 늙은 노인의 모습 또한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다가올 시기이다. 언젠가 내 아기가 드넓은 날개를 펼치며 독립을 하게 되었을 때 나 또한 다시 부모의 홀로서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때의 내 모습이 아직 상상이 잘 되지 않고 한편으론 그 공허감이 꽤 크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가 왔을 때 그림 속 울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아닌 아기를 안고 있는 온화한 여성의 모습처럼 그 이별 또한 담담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엄마와 아기>라는 부제로 그림이 유독 사랑받는 이유는 아기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림 속 여성처럼 한결같이 평온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마지막 시기의 노인의 모습 또한 우리의 삶을 깊이 반추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애착을 가진다. 노인의 배경을 보면 앞선 두 시기보다도 더욱 황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건 아마도 두 시기를 살아온 노인의 삶이 그만큼 찬란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노인은 쇠약해진 몸으로 삶의 끝자락에 있지만 그녀가 앞선 두 시기를 보내는 여정은 누구보다도 반짝였을 것이다. 배침대로 밀착된 아기의 무게와 허벅지를 툭툭 건드리는 앙증맞은 발, 내 호흡과 일치하며 느껴지는 아기의 호흡은 지금처럼 느낄 수 없을지라도 딸아이의 성장을 바라보고 내 품 안을 떠나는 모습 또한 기쁘게 여길 것이라 하루하루 다짐해 본다.
언젠가 너의 시기가 될 나의 시기는 너로 인해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는 것을 알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