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가장 사랑스러운 만다라
삶의 어떤 행복은 기쁨과 함께 주어져도 끊임없이 불안함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함은 끝내 그 행복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만들고나서야 사라진다. 작년 8월 무렵, 난 낯선 상황이지만 익숙한 의자에 누워있었다. 방안의 빛은 거부감이 일 정도로 눈부시게 느껴졌고 적막 속의 내 감정은 비교적 무뎠다. 임신을 한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아이를 잃는 것은 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무엇도 실감나지 않았던 것 같다. 간호사들은 내 옆에 서서 문쪽을 계속 힐끔거렸고 그 어색함에 불편하여 난 방안을 채우는 기계음에 멍하니 집중했다. 산부인과에 올때마다 불편하게 느꼈던 자세로 한참을 누워있자니 내 치부가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민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했던 것은 ‘아무렇지않은 척’ 하는 것이었다. 유산결과를 받기까지 일주일, 판정부터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또 일주일이 걸렸다. 그 시간도 나에겐 꽤 길게 느껴졌지만 의사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몇분은 이주보다도 길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왜 이곳에 누워있게 된건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미없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시간은 고통보다는 우울에 가까웠고 그 우울은 슬픔보다는 아무것도 기쁘지 않음에 가까웠다. 시각디자인을 공부한 나로써는 세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다채로운 색감으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침묵의 시간동안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방안의 그 환한 빛에도 불구하고, 흑백이었다.
마취에서 깨어나 회복실의 침대로 몸을 옮긴 후 나는 비로소 내 안에 아이가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실 아기를 품을 때부터 난 이전과 다른 불안함을 느꼈고 그 불안함은 아기가 내 몸을 떠난 후에야 사라졌다. 무덤덤했던 감정의 창이 깨지고 파편이 튀었다. 링겔을 맞는 동안 나는 불안 대신 비집고 들어온 스스로 대한 연민이라는 감정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티베트의 수도승들은 염색된 모래를 가지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지.
며칠이나 몇 주 동안 공들여 완성한 다음 다 지워버려.
이곳에서의 경험을 만다라라고 여기도록 해. 최대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
미국의 한 드라마 속 등장하는 이 대사는 내가 인생에서 점과 선, 면의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떠올리곤 하는 말이다. 한순간에 교도소에 입소하게된 여성 주인공이 동료수감자에게 듣게 되는 말인데 교도소라는 암울한 공간에서의 경험이 만다라라니, 어찌보면 선뜻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 부분일 것이다.
만다라(Mandala)는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불화(佛畫)다. 그림의 형태는 원형이나 삼각, 사각의 특정한 경계를 여러 겹으로 겹쳐 연출한다. 그리고 그 안에 다채로운 색을 입히면서 완성한다. 종교적 측면에서 만다라가 지니는 의미를 쉽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만다라의 반복적인 패턴과 그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과정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 때문에 작업 동안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고, 다양한 패턴과 채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전반의 모습과 꽤나 닮아보인다.
회복실에서의 치료가 끝난 후, 의사선생님이 보여주는 초음파 속 내 몸은 허무하다시피 텅비어있었다. 무던히 의사선생님의 설명을 듣던 중, 차트를 다시 살피던 그의 한마디에 내 몸과 마음의 온도가 순식간에 따뜻해지는 듯했다.
“다행히 딸 하나가 있네.”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수함으로 충만한 동글동글한 두 눈, 눈송이를 붙여놓은 듯한 볼록한 두 볼, 집중할때마다 삐죽히 내미는 입술, 그 사이로 튀어나오는 서툰 감정과 이미 충분한 사랑표현. 내 딸아이를 생각하자니 부정적인 감정이 서서히 내려가고 아이가 가진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산책로에서 따뜻한 손길로 유모차를 잡고 있는 남편, 그리고 세상 편안하게 유모차에 앉아 즐거워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아기는 어울리지않게 줄무늬 내복에 알록달록한 끈원피스를 입은채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난 남편이 딸아이에게 선보인 패션솜씨에 우스웠고 내 지적에 머쓱해하면서도 나를 걱정해주는 남편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내 딸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가장 풍요로운 미소를 지으며 기분좋게 웃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난 그 자체로 치유받았다. 흑백의 시간이 생동감 넘치게 채색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기를 안는 행복을 느꼈다.
난 비로소 스스로에게 던졌던 지나간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그것 또한 내 만다라의 한 점, 혹은 선일 뿐이다.’
내 딸은 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다. 이 세상에 사랑을 표현하는 그 수만가지의 단어와 문장을 다 결합해도 내 아이에 대한 사랑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위한 삶을 살아왔던 과거에서 어느덧 아기가 내 현재이자 미래가 되었고 내 삶의 만다라는 내 아기 그 자체다. 티베트 수도승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마음으로 딸의 행복을 가장 거대하고 아름답게 그릴 것이다. 애정을 가지고 평생을 공들여 완성한 다음 훗날엔 내려놓고 소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나는 딸아이를 위해 최대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가족의 일상을 만들 생각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의 얼굴에서 아름답고도 풍성한 색감을 본다. 그리고 딸아이를 보며 되뇌인다.
아가야, 너는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만다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