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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이 Nov 19. 2024

행복의 수레바퀴

[호수골짜기의 풍경] 헤르만헤세

행복의 수레바퀴




  “명랑하게 반짝이는 바다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와 아기는 침대맡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새롭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아기에게 ‘오늘의 바다’를 말했다.

  25개월인 나의 딸이 할 수 있는 말은 20개 정도이다. 그것조차 사실상 의미 있는 단어는 엄마, 아빠, 아가 등 몇 개 되지 않는다.

  나는 공무원이 되기 전, 약 10년간 입시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했고 많은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친 사람으로서 ‘언어습득은 빠른 게 좋다,’라고 늘 생각했었다. 때문에 딸이 엄마, 아빠를 6개월 무렵 내뱉었을 때 안도와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자만이라는 감정이 존재했다는 것도 솔직한 사실이다. ‘나는 영어를 가르쳤으니까’, ‘내 남편도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당연히’ 우리 아이는 언어가 빠를 거야,라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우리 딸은 말이 늦은 아이다.

  나는 딸의 늦은 말 트임에 대해 아기가 18개월 무렵일 때부터 고민했다. 그리고 어느새 18개월 언어발달, 19개월 언어 수준 등등 매달마다 다른 아기들은 어느 정도로 말하는지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즉 아기가 두 돌도 안 된 시점부터 난 아기를 ‘비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한참이나 어린 내 딸에게 참 가혹한 부분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 ‘수레바퀴 아래의 한스’처럼 나는 단순히 걱정을 넘어서 나의 명예 때문에 아기를 비교한 것이 아닐까. 눈에 띄게 영리했던 한스는 어른들의 기대에 눌려 낚시와 토끼 키우기 등의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없었고 일상의 아름다운 풍경조차 누릴 수 없었던 소년이다. 또한 한스를 창조한 헤세도 비슷한 어린 시절을 겪었고 상당히 힘든 내면의 폭풍을 안아야 했다.

  어른들은 아이의 삶이라는 수레에 지나치게 많은 기대와 욕구를 투사하고 그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지 말라고 부추긴다. 다른 이들보다 빠르고 강하게 수레를 끌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며.

입시경쟁의 현장에서 10여 년간 일하며 나 또한 그런 어른이었지만 그런 부모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어치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얼마 전 한 카페에서의 사건 때문이었다. 여섯 살 무렵의 아이들이 놀고 있을 때 내 딸아이가 같이 어울리고 싶어 아이들 옆에 앉아있었고 그때 한 아이가 ‘언니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내 딸은 그 말을 ‘아나나’로 따라 했다. 이내 다른 아이가 웃으며 ‘제대로 말도 못 하는데’라고 말했고 곧 ‘아나나’는 ‘바나나’, ‘반하나’라는 말들로 아이들 사이에 장난거리가 되었다. 그 아이들에겐 분명 농담이고 장난이었다. 하지만 말 늦은 아이를 둔 엄마의 마음은 아이들의 사소한 장난에도 무너져 내렸다. 난 막연한 걱정이 아니라 말이 늦을수록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구체적인 걱정을 하게 되었고 언어치료를 결정했다.

  원목의 세 칸 계단, 볼록한 바닥매트, 한쪽에 칸칸이 나열된 블록과 인형, 갖가지 장난감들. 작은 방에 들어서자 한눈에 들어오는 것들이었다. 자주 보던 물건들이지만 왠지 이곳에선 낯설었다. 그리고 이 작은 방의 도구들과 후끈한 열기를 마주한 순간, 이곳에서 나의 아기가 ‘테스트’라는 것을 받는구나, 나는 아기에게 미안한 감정과 테스트에 대한 긴장감을 동시에 느꼈다. 겨우 검사가 끝난 후 아기의 손을 잡고 나오는 길, 아기는 다소 지루했던 긴 시간이 끝난 것에 그저 신이 난 듯 보였다. 아직 테스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리고 순수한 나의 작은 아기. 난 아기를 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티 없이 맑게 웃는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난 아기의 수레에 언어라는 무거운 짐을 실어버린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스가 사랑했던 녹음을 뽐내는 나무와 잔잔한 바람에 조용히 찰랑이는 호수, 소중하게 느꼈던 주변의 동물들과 친근했던 사람들, 헤세가 그린 평화로운 마을과 여행지의 치유의 풍경들처럼 내 아기에겐 일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고 싶다.

어느 날은 새로운 해가 떴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둡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희뿌연 안개로 비밀스럽기도 한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얼굴로 다정하게 인사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충만한 행복. 이 아름다움과 일상의 행복이 내 딸의 삶이라는 수레에 가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의 두 눈에 '오늘의 바다'를 담아본다.

호수골짜기의 풍경 Blick ins seetal, 1930

이 세상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온 거야.

기억해. 다른 아무것도 없어.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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