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by 최희정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사거리 정지 신호 앞에 서 있는 차 안을 가득 채웁니다. 편지를 쓰겠다는 노래는 편지가 됩니다. 한숨인 듯 읊조리는 낮은 목소리는 종이가 누렇게 바랜 편지 같습니다. 가을 어느 날, 이 노래를 듣게 되면 누군가 내게 보낸 오래된 편지를 펼쳐 보듯이 노래를 읽습니다.


얼마 전 생텍쥐페리와 그이 부인 콘수엘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펴낸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15년간 주고받은 168통의 편지가 들어있습니다. 왜 이렇게 답장이 없냐며 서운해하는 듯한 내용도 있고 너무 바빠서 그러니 섭섭해 말라고 달래는 말도 있습니다. 편지의 끝마다 서로 사랑한다며 속삭이고 있습니다. 15년 동안, 주문처럼!!


시월 들어서 비가 잦았습니다. 비는 여름과 헤어지는 나뭇잎에게 위로를 적어 보냅니다. 나뭇잎은 흐느끼는 마음을 풀잎에게 전해줍니다. 풀잎이 흘린 눈물은 주루룩 흘러내려 땅을 적십니다.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이별 편지처럼 그렇게 비가 왔습니다.


비의 편지를 듣던 새벽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환자에게 행하는 아침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침대 옆 사물함 벽에 붙여진 사진과 종이가 보였습니다. 사진 속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중년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군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청년과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춘기 소년이 있습니다. 긴 생머리의 젊은 여성도 있습니다. 모두 앞을 바라보고 웃고 있습니다.


사진 아래에 편지가 있습니다.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입니다. 아마도 긴 생머리의 그녀가 쓴 편지 같습니다.


‘아빠, 막내가 오랜만에 방 정리도 하고 레고도 정리했어요. 둘째가 군대 갔을 때 사진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오늘 우연히 찾았어요. 아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 좋네요. 평범했던 아빠와의 일상이 많이 그립고 그리워요.’


그녀의 아빠는 몇 년 전 겨울 어느 저녁 쓰러져 뇌출혈이 온 후 지금까지 병원에서 누워 지냅니다. 사진 속의 그는 이마가 조금 훤합니다. 얇은 등산복 점퍼 차림입니다.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저씨 모습입니다. 머리는 아주 진한 검정으로 염색했습니다. 그게 약간 촌스러워 보입니다. 집에서 자식들에게 세상 유행 모른다는 구닥다리 취급도 받는 그저 그런 평범한 아빠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녀도 사춘기 시절 아빠가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을지도 모릅니다. 가족 외식을 하러 고깃집에 가자고 하면 같이 가기 싫다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마라탕을 먹자고 했다가 그런 게 뭐가 맛있냐는 지청구를 듣고 조금 삐지기도 했을 겁니다.


막내가 오랜만에 방 정리를 했다는 말을 적은 것을 보니 막내에게 방 정리 좀 하라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나 봅니다. 그때는 지나친 잔소리였고 유행에 쳐진 구식이 지금 돌이켜보면 평범한 일상이었다는 생각이 드나 봅니다.


그녀의 아빠는 등산복 점퍼 대신 환의가 입혀지고 염색할 머리카락도 없어진 채 누워있습니다. 사진 속의 미소도 없습니다. 오랜 누워 지내면서 다리 관절이 굳어 뻣뻣합니다. 입으로 음식도 먹을 수 없어 콧줄을 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위관으로 식이를 공급받은 환자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처지가 되면 나는 콧줄을 거부하리라 자주 생각합니다.


딸의 편지에는 아빠에게 사진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빠도 사진 보면서 가족들과의 시간을 기억하고 누워 계시는 동안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끝을 맺습니다.


편지의 잉크가 조금 번져있습니다. 아마도 이런저런 처치 중에 젖은 것 같습니다. 아빠를 사랑한다는 마지막 문구 옆에 작은 하트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하트가 젖지 않게 편지가 젖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퇴근길에 비가 그쳤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무것도 적지 않은 깨끗한 편지지 같습니다. 나는 구름 편지지에 글 한 줄 적어봅니다. 비록 밥이 아닌 콧줄을 통한 유동식을 먹더라도 딸 곁에 오래 아빠가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