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번째 그만 둠
IMF는 그 시대의 중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청소년의 삶도 휘청이게 만들었다. 부모의 삶이 변화하면 아이들의 삶은 자연히 따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인생은 난데없이 독특한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까지 공부에 관심이 없던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차 학기 중 대전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졸업식만 겨우 참여하고 졸업 조건에 어긋나지 않는 날만큼 학교를 결석하며 고등학교의 입학을 기다렸다.
졸업도 전에 마구 결석을 한다는 것이 께름칙했으나 이러나저러나 어떤가? 고등학교만 들어가면 새 시작인데. 그러나 남들이 평범하게 들어가는 고등학교 입학조차 나에게는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대전은 최첨단 과학도시였고 실업계 고등학교가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던 것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졌다. 대전 고등학교에 T/O가 날 때까지 기약 없이 머물며 입학 예정이던 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을 오거나, 일 년을 꿇고 대전에서 재입학을 하는 것. 갑자기 학교를 1년이나 안 다녀도 된다니, 당연히 두 번째 옵션을 선택하고 일 년간 내 인생에 다시없을(줄 알았던) 허송세월을 보냈다.
1년이 지나고 나는 복학생이 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문은 어찌나 빠른지, 같은 분단 친구의 이름도 미처 다 외우기도 전에 나는 일 년 늦게 학교를 들어온 서울에서 온 깍쟁이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사실 나는 서울이 아닌 일산에서 이사 왔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첫인상이 가져다주는 프레임 효과는 대단하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일부 아이들을 나를 신기해하며 다가왔고, 일부 아이들은 견제했다. 나와 나이는 같지만 학년은 다른 2학년 선배들은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동물원 구경하듯 나를 보고 속닥거렸다. "쟤래." 도대체 쟤가 뭐 어떤 애라는 것인가? 그러나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기에 나 역시 여유로운 동물원 원숭이처럼 내 갈길을 걸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청소년들이 늘 그러하듯이 또 투닥거리며 잘 지냈다.
청소년 시기에 늘 그러하듯 교실에는 왕따가 존재했다. 우리 반 상호작용의 독특한 패턴은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면 왕따 당하던 친구는 무리에 수용되고 새로운 아이가 왕따의 대상이 되는 일이 반복되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러다 나와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가 다음 타깃이 되었다. 우정이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시기에, 무려 한 살씩이나 나이가 많은(그래서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던) 나는 한 마디 거들어야겠다는 돌발행동을 했고, 이는 아이들의 어떤 버튼을 누르기에 충분했다.
"야, 유치하게 그만 좀 하자." 내가 던진 건 고작 이 말 한마디였다. 그 순간 분위기는 싸해졌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번 타깃은 나로구나. 내가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라니. 그저 다른 지역에서 이사 왔을 뿐인데, 사정 상 일 년 늦게 입학했을 뿐인데. 이미 시작도 전에 나는 이방인이었고, 이방인 주제에 튀지 말아야 하는 줄도 모르고 온정을 기대하기엔 나 역시 뾰족한 성정의 소유자였으니, 아이들의 경계에도 숙이지 않는 나의 태도에 따돌림의 강도는 점점 심해졌다.
두 달만 지나면 2학년이었다. 새롭게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책상에 칼자국으로 "서울로 돌아가"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본 날에는(서울이 아니라고) 더 이상 학교라는 곳을 다닐 필요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를 어떻게 그만둔담?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반항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