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17)
난생 처음 제주도에 온 것은 대학교 1학년의 겨울방학이었다. 지금이야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니 일본이니 하는 세상이지만 그 시절의 수학여행이라곤 경주, 설악산이 고작이었으니 비행기를 처음 타 본 것도, 제주에 처음 온 것도 스무 살의 겨울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스무 살 시절.
그렇게 설레는 여행이 남자 친구와의 꿈같은 여행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끼리끼리 모인다고 주변머리 없는 우리 친구들은 장롱 초보운전이지만 기세 좋게 내가 운전할게! 하고 나서는 놈이 하나 없어서 기사 딸린 승합차를 빌려 시시하고 하품 나오는 '관광'을 다니게 되고 말았다. 운전기사님도 스무 살, 스물한 살 여대생 다섯을 태우고 이렇게 차분한 관광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셨겠지. 여하튼 지금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기억나는 것은 한 겨울이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성산일출봉을 올랐던 것과 남원 큰엉에 갔었던 것, 딱 두 가지다.
어딘지도 모르고 봉고차(!)에 실려 여기저기 내려주면 구경하고, 다시 타고 패키지여행과 다름없이 관광을 하고 다니던 중 차가 '신영영화박물관'에 멈추었다. 이런 건 별론데 싶은 마음이지만 딱히 대안도 없으니 그저 쭈뼛쭈뼛 기사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작은 오솔길을 따라 조금을 내려가서 눈 앞에 드라마틱하게 펼쳐진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내가 꿈꿔 온 '제주도' 바로 그 자체였다. 그저 맹물 같았던 여행을 한 순간에 톡 쏘는 탄산수로 바꿔주는 마법과도 같이 말이다. '한 없이 푸르게 펼쳐진 바다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고'라는 흔해빠진 문장을 현실에 옮기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내게 제주도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곳을 꼽았고 제주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여행을 올 때마다 한 번씩 찾는 곳이 바로 '남원 큰엉 해안 경승지'였다. '큰엉'은 제주어로 큰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남원읍의 큰 바위 언덕쯤으로 생각하면 될 텐데, 제주에서도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로 유명한 남원의 아름다운 바다와 힘 있고 박력 있는 색깔의 검은 바위, 그 바위틈을 비집고 거칠게 자라난 나무들, 거기에 정갈하게 가꾸어진 산책로가 나란히 하고 있어 그저 머릿속을 비우고 경치를 즐기면 되는 그런 곳이다.
글을 쓰면서 큰엉에 대해 찾다 보니 원래 신영영화박물관의 사유지였던 길이 예쁘기로 유명해지자 해안산책로로 개발되어 1999년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민간에 개방된 것이라고 하니, 기사님이 나름 그 시절 따끈따끈 막 알려지기 시작하는 '핫 플레이스'에 데려가 주셨던 모양이다. 약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호젓하고 아름다워 언제 누구와 방문해도 실망하는 법이 없는지라 나에겐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어 떠올리면 어쩐지 심장이 몰캉몰캉 해지는 그런 곳이다.
이건 살짝 풀어놓는 꿀팁인데, 금호리조트 주차장에 슬쩍 차를 대고 리조트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를 하나 사 들고 - 아, 물론 여름이라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해요 - 해안산책로의 끝까지 걸어가면 널찍한 바위가 나타나는데, 거기에 자리를 잡고 조용하게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 하면 남부러울 것 없는 나만의 오션뷰 카페가 완성된다. 남원포구에서 시작되는 올레 5코스에도 포함되는 길이어서 조금 더 욕심이 난다면 올레길 표식을 따라 걸어보아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