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21)
정확히 십 년 전의 일이다. 제주도에 다녀온 지인이 기가 막힌 음식을 맛보았다며 제법 흥분을 하여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로부터 한 달 후 떠난 제주 여행에서 당장 달려가 그 음식을 만나게 되었다. 입맛 취향이 비슷한 나 역시 당연히 순식간에 그 음식과 사랑에 빠져 버렸고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기억 속에 꼭꼭 저장해 두었더랬다.
그리고 왜인지 그 기억은 서랍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얼마 전,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다시 찾지 않은 스스로를 한참이나 자책했지 뭐야. 십 년이 지나 다시 맛 본 그 맛은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재가공된 것이 아니라, 과연 여전히 대단한 맛이었다.
그 음식이 바로 이름도 생소한 겡이죽 되시겠다. '겡이'는 깅이, 갱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제주어로 방게를 말한다. 그렇다. 옆으로 걷는 그 게로 끓인 죽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게살죽이 아니라 게를 껍질째 갈아 죽을 끓인 것인데 아마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테니 천천히 설명을 해 보도록 하겠다.
제주 해안지역이라면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해녀의 집이고, 이 곳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섭지 - 그러니까 섭지코지 - 에서 운영하는 해녀의 집이다. 물론 당연히 해산물의 질이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말이다. 십 년 전과 미묘하게 실내가 변했는데 훨씬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었고 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어디에서 또 성산일출봉이 저렇게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겠나.
유쾌한 해녀 삼촌께 겡이죽 하나와 전복죽 하나를 주문하니 이내 반찬이 나온다. 별다를 것 없지만 미역무침과 톳무침에 쉬지 않고 손이 간다. 톳 무침은 제주도 식으로 된장을 넣어 새콤하면서도 구수함이 좋아 나중에는 무침소스까지 물회 먹듯 싹싹 긁어먹었다.
겡이죽은 게를 갈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 전복죽을 먼저 내주셨다. 내장의 푸르스름함이 도는 고소한 전복죽의 전형이다. 뒤적뒤적하니 큼직하고 호방한 사이즈의 전복이 몇 덩어리나 눈에 띈다. 쩨쩨하게 눈에 뵈지도 않을 정도로 전복을 다져 넣은 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스케일이다. - 도민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고 익숙한 듯 담담한 척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놀랄 정도의 푸짐함이었다.
전복죽을 반쯤 비웠을 때 겡이죽이 도착했다.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바다의 향이 훅 느껴진다. 전복죽보다 훨씬 진하고 거무스름한 색의 죽인데 일행과 번갈아가며 코를 들이박고 킁킁대며 향을 맡을 정도로 진하고 깊은 향이 느껴진다. 겡이죽은 앞서 잠시 설명했던 것처럼 방게로 만드는데 봄이 제철인 방게를 잡아 냉동해 일 년 내내 사용하신다. 그 방게를 주문이 들어오면 통째로 드르륵 갈고 체로 거르는 작업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 쌀과 함께 죽을 쑤는 것으로 혹여나 게껍질의 식감이 느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게의 껍질과 내장까지 온통 사용하였으니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떤 게요리 보다도 진하고 깊은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겡이죽을 먹다가 전복죽을 먹으니 전복죽의 맛과 향을 다시 느끼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정도로 진한 맛이다.
뜨뜻한 보일러 방바닥에 앉아 기가 막힌 경치를 보아가며 뜨끈한 죽을 먹고 있자니 온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이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양이 적지 않아 배가 터질 듯 먹었는데도 속이 불편하지 않으니 좋은 에너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옆 테이블에 아저씨 관광객 무리가 들어오셔서는 겡이죽이 뭔지 물으시고는 생소한 이름과 내키지 않는 설명 때문인지 - '겡이가 게예요'라고 하셨다 - 전복죽을 주문하시는데 진심으로 손 들고 겡이죽 한 번 드셔 보시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 오지랖이 자연스러운 나이까지는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저기, 제가 아직 수줍어서 글로 밖에 표현을 못 해요. 다음에 가시면 겡이죽 드세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