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시골 민박집 주인장의 일상 이야기 (08)
문자 그대로 낼모레 마흔이다.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엄밀히 말하면 내일이면 마흔이 된다. 나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것도 자랑도 아니지만 새삼 연말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기도 하고, 특히 앞자리가 바뀌는 일을 앞두고 있다 보니 이 정도 상념에 빠지는 것은 슬쩍 눈 감고 넘어가 줄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이렇게까지 말해 놨으니 맘 놓고 '이 정도 상념'을 시작해 볼까.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이었던가 윤리시간이었던가 여하튼 '불혹'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과목이 있었는데 새파랗게 어린 나이였지만 그 단어가 그렇게 좋고도 설렜었다. 불혹(不惑).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 그때쯤이면 분명 더 이상 혼란스러울 것도 흔들리는 일도 없겠지,라고 막연히 동경하던 나이였는데, 과연 내일의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공자 슨상님. 진정 마흔의 나이에 마음이 온통 평정하셨단 말입니까. 저는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힘들 것 같아요. 돈이고 명예고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흔들림 없는 마음'조차도 갖지 못한 채 그렇게 미혹(薇惑)한 내가 마흔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렇게 미숙한 내가 - 다가올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불안하지 않기 때문도, 자신감이 넘쳐흘러서도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와 함께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 행복하다고 자꾸만 말하는 스스로에 대해 문득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강박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 보았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어 왔던 길고 긴 터널을 끝내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 것인지 알았으니 이제는 안쓰러웠던 나를 조금 더 사랑하고 보살펴줘야지.
토끼 같은 자식도, 듬직한 남편도, 아니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없는 주제에 '이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혜안조차 갖지 못한 채 아직도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천치인 데다, 지갑은 빈털터리요 내 명의로 된 집도 절도 한 칸 없는 서른아홉 하고도 12개월 365일 차의 나.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으면 어떤가. 세상 끝난 것처럼 한탄하던 몇 해 전의 내가 지금은 한없이 귀여워 보이듯,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면 2018년 12월 31일, 오늘의 내가 그렇게도 젊고 기운이 넘치는 '나'일 테니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지. 누군가 그랬잖나. 마흔에 시작하면 마흔다섯쯤에 뭐라도 되어 있겠지,라고. 그러니까.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