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 전부터 내 이름은 연서, 예쁘고 지혜롭다는 뜻의 연서. 1999년 가장 운 좋은 달의 마지막 날 즈음 나는 이리도 예쁜 이름을 가지고 아무 계획도 없이 이 운명 속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계획 없이 사는 걸지도 모른다. 남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이름 앞에 성을 붙여 불리는 걸 싫어한다. ‘연서야’하고 불리는 그 부드러운 발음에 마음까지 무장해제되는 간질거림이 좋기 때문에. ‘김’이라는 흔하디 흔한 성이 붙으면 예쁘고 지혜롭다는 의미는 그만 희미해지고 ‘김연서’라는 딱딱한 발음만이 남기 때문에. 아마 성은 의미가 소실된 채 영원히 나를 따라다니겠지마는, 지울 수는 없겠지마는, 이 글을 본다면 ‘연서’라는 다정한 호칭으로 내 이름을 불러 주길 간곡히 부탁한다. 갑자기 왜 이름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겪은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적엔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부모님은 일을 하시느라 늦게까지 집을 비우셨고, 혼자 있을 나를 위해 금붕어 두 마리를 사주셨다. 처음 부여받은 책임감이라는 무게는 혼자 들기에는 꽤나 무거운 것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모순적이지만, 나는 집에 있는 시간 내내 나의 작은 금붕어들이 사는 어항 속에서 함께 지냈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금붕어의 자태는 어린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밤에 잠은 잘 잘까, 내가 학교에 갔을 때는 심심해하지 않을까 하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걱정과 애정은 물거품이 되어 어항을 둥둥 떠다녔다. 과한 애정에 질식을 한 걸까? 어느 순간 숨 쉬는 것을 힘들어하더니, 사랑하던 이들은 한 해가 조금 지난 후, 잇따라 내 곁을 떠났다. 내 생에 첫 상실이었다. 그 후로 며칠을 밥도 먹지 않고 커다란 상실감을 안고 지냈다. 그때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슬펐지만 살다 보니 그때의 상실감은 금붕어만큼이나 작았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인생은 항상 소중한 것을 안겨주는 것보다 빼앗아가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 성을 빼앗아 갔던 것처럼, 한때는 나 자신과 동일시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영영 들을 수 없게 된 것처럼. 어렸을 적에는 상실의 자국이 너무나도 오래 남아서, 그 자국이 너무 흉해 보여서 이것저것 덧대어 가리기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내 상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다. 마치 내 몸에 있는 흉터가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이제는 이전만큼 잘 울지 않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태생적으로 눈물이 많은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앞으로도 이 못 믿을 운명은 내게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갈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계획을 가지고 살지 않으려 한다. 나의 태초의 탄생이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인간은 약하고 인생은 무작위니까. 소중한 것을 빼앗았다가 상실의 파도가 턱 끝까지 차오를 때면 살라고, 살아가라고 밧줄 하나 던져주니까. 그러면 나는 그게 언제 다시 끊어질지 모르는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또 삶의 끝자락을 붙잡겠지.
수없는 상실과 만남, 분노와 행복,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겪고 비로소 지금의 내가 되었다. 아직도 나 자신을 소개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아직 24년밖에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안다 말하는 건 오만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그 사실이 좋다. 앞으로 어떻게 이 운명을 꾸려 나가야 할지 조금은 겁나고 설렌다. 아, 이름대로 사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나 자신도 잘 모르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순이다. 나는 나를 알아가기 위해 산다. 나 자신에 대해 다 알게 되는 날이 오면 인생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나에 대해 한참을 모르니까, ‘나’란 내 생의 전부를 걸어 탐구해야 할 무엇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