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시나요.
우리는 도시 여행자다. 우리는 아무런 감각 없이, 혹은 그 감각들과 대화하지 않는 채로 거리를 걷는다. 계절이 바뀔 때를 제외하고 익숙한 도시 풍경에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새 가게가 들어서면 ‘어라, 이 자리에 뭐가 있었더라?’ 희미한 기억을 되짚다가 포기할 뿐. 한 때 우리에겐 모든 길들과 모든 벽과 거기 사는 모든 생명체가 놀이터고 탐구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오로지 익숙한 아스팔트길, 보도블록, 횡단보도, 신호등, 가로수들만이 우리를 지나친다. 우리는 거리에서 스스로를 낯설게 하는 연습을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장소에 대한 한 타성에 젖어 있다.
“나는 그저 모르는 삶 속으로 망설임 없이 달려 들어갈 수 있는 존재였다.” 친한 선배가 여행 수기를 책으로 내며 이렇게 적어두었다.(오성윤, <짧은 휴가>) 그 선배와 종종 여행에 대해 나누던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행의 익명성에 공감하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이상향에 가깝게 여행하는 사람. 여행지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여행자’라고 하면 그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의 이면들을 속속들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삶의 진실을 다른 단면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서 내 삶은 어디로든 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걷고 또 걸으면 무슨 일인가 벌어졌고, 뭐든 느끼게 됐다. 살아생전 처음 거리를 걷는 사람인 양, 모든 건물의 지음새와 모든 글자와 모든 맨홀 뚜껑의 모양을 탐닉하며 머릿속에 집어넣기 바빴다. 나의 반응은 좋은 의미로 아주 1차원적이었다. 여행자가 되어 비로소 나는 삶의 경탄을 되찾고는 했다.
4년 전의 방콕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일주일간 나는 너무도 가벼웠다. 숨결처럼 가볍게 이곳저곳을 누볐다. 나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 그리고 구글 지도라는 든든한 보루 속에서 그보다 안일한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는 별 거 아닌 일들이 별거가 되었다. 역 앞에서 피자를 사 먹다가 버스킹 선곡이 너무 좋아 선 채로 끝까지 들었다.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고급 호텔 바에서 칵테일을 즐기며 재즈를 들었고, 춤추는 사람을 구경했다. 낮이면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걷고 또 걸었고, 밤에는 침대에 빨려가듯 깊이 잠들었다. 나는 하루를 아주 충실하게 살았고 충만하게 잠들었다. 험블한 오토바이를 타고 으리으리한 도서관에 방문했으며 인적이 드문 슬럼가부터 고급 인테리어 가게가 즐비한 부촌까지 고루 오갔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짧고 피상적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를 지치게 하지 않았다. 하루 만에 서너 곳의 칵테일 바를 오가며 일곱 잔의 칵테일을 마셨다. 어딜 가든 코코넛 워터를 사 먹었다. 해가 지는 공원에서 아주 느리게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모든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거침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지나온 여행의 면면을 잘라보았고 여행의 익명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아무리 일주일짜리 여행자라 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아시아에서 온 작은 여자’라는 꼬리표가, 대만에서는 ‘K팝과 소주의 나라 한국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나를 따라다녔다. 덕분에 공짜 술을 얻어먹거나 이유 모를 친절을 경험한 것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그럴 때 나는 조금은 절망감을 느낀다. 나에게 장밋빛 밤은 필요 없어. 내 계획에 모르는 남자에게서 손등에 키스를 받는 일은 없어, 아니 나에겐 아무 계획도 없어. 계획이 없다는 건 그 어떤 상호작용도 아주 극도로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나는 때로 자기특정적인 여행을 하면서 장소특정적 여행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손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시대에 사는 탓에 그 어디에서도 방랑자가 되기 어렵다.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길을 잃는 법’을 터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정체성들이 너무도 거추장스러운 나머지 다른 공간에서 존재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내가 나를 잊도록 여행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너무 오랫동안 길에서 살아서 옷은 다 해지고, 몸은 거무튀튀하며, 성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난 사람이 된다면 모르겠다. 어디에서 왔는지 잊었고 목적지도 없으며, 그 어떤 사람과의 대화도 꺼리지 않는 그런 상태. 종교도 믿음도 없으며 어디에서 무슨 일이든 해 밥값을 벌며 그러면서도 슬픔에 젖어있거나 희열에 들뜨지 않은 상태.
오래전 아버지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이라는 노래를 틀어두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지었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상념 끊기지 않는/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익명의 누군가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것, 그것은 노랫가락 속에서나 완성되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