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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Mar 21. 2024

자활 노동을 하십니까?

세탁기가 생기면 빨래는 안 해도 되는 줄 알았건만.

엄마가 시래기를 다듬고 국 간을 맞추는 동안 나는 압력밥솥의 치카치카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밥 데워지는 냄새가 거실에 퍼지고 있었다. 엄마는 밥을 푸기 직전부터 삼 남매와 아빠를 목청껏 불러댔다. 결국은 반찬이 다 식탁에 올라오고 난 뒤에야 다들 미적미적 방에서 나왔지만. 그러고도 엄마는 모든 사람의 식사가 거의 끝난 뒤에야 식탁에 앉았다. 다섯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혼자서 살게 된 뒤에 나는 원룸의 코딱지 만한 부엌에서 파스타와 이것저것을 해 먹어보려고 노력했다. 두 달이 채 못 가 파스타에 물렸고 시장에서 산 두부 한아름이 소분된 채 냉장고에서 물러 터졌다. 나는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걸 알았다. 많이 먹어본 사람이 요리도 잘한다는 말이 맞았다. 


그다음에는 바닥을 열심히 쓸었다. 바닥을 쓰는 건 오래갔다. 방이 좁아 보이는 게 싫어 침대를 놓지 않고 바닥에서 요를 깔고 잔 덕이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준 밀대로, 집에 쓰고 남은 일회용 마스크가 쌓이기 시작하자 마스크로, 코로나가 끝나자 당근거래로 물건을 팔고 난 뒤 생긴 송장 스티커로. 매일같이 쓸어도 먼지는 새카맣게 묻어 나왔다. 침대를 들이고 난 다음에 나는 방 구석구석까지 쓸던 부지런에서 보이는 머리카락만 대충 찍어내는 게으름으로 점차 변해갔다.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가장 먼저 손을 놓은 것은 청소와 샤워였다. 나와 내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 정리 정돈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정돈보다 청결을 중요시하는 다소의 강박증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지막 보루였는데. 심하면 나흘이 넘는 동안 샤워도, 바닥 청소도 하지 않고 빈 방에 누워 있었다. 빈티지 사업을 하면서 집에 재고가 쌓여갔고 집안을 옷 무더기로 발 디딜 틈이 없이 어지러워졌다. 먼지가 많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집 안에서도 기침을 해댔다. 몇 달 동안 버리지 못한 재활용 쓰레기들이 현관 앞에 가득했다. 


다행히 하나 절대 놓을 수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 빨래였다. 돌던 세탁기가 멈추자마자 몸을 일으켜야만 했고 널어놓은 빨래는 다음 빨래를 할 때즘엔 반드시 개어 넣어야 했다. 며칠 동안 천장에 빨래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을지언정 세탁기는 일주일에 한 번은 쉼 없이 돌아갔다. 빨래를 너는 일은 무척 귀찮아도 빨래가 바짝 마르는 여름이면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하고 바삭바삭한 옷의 질감에 마음이 잠깐 평화로웠다. 다사로운 햇빛에 내 옷을 말리는 일,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자활노동이었다.


사람은 살아가며 세 가지의 노동을 한다. 주로 돈을 벌기 위해 남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타율노동(보통 직업이 여기에 해당하며), 그 어떤 다른 목적도 없이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자율노동(보통 취미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주변을 돌보는 자활노동. 집안일과 육아 등은 자활노동에 속한다. 필수적인 노동은 보통 타율노동, 자활노동 두 가지로 꼽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타율노동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쏟고 자활노동은 외주(주로 집안팎의 중년 여성에게)를 준다. 자율노동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스크롤을 무한히 내리는 것으로 좁아졌다. 


타율노동에 지친 사람들은 자율노동에서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고난도의 스포츠를 하며 짜릿함을 느끼거나, 원데이 클래스를 들으며 부업과 퇴사를 꿈꾼다. 현대인의 타율노동, 자활노동, 자율노동 순서로 비중의 막대그래프를 그린다면 거꾸로 된 포물선 정도를 그릴 것이다. 자활노동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 포기한 노동이다. 내 경우엔 삶의 자극만을 좇아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가 되었지만 간간히 빨래를 할 때, 청소를 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내다 버린 뒤 제로웨이스트숍에서 꼭 필요한 칫솔 따위를 살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자활노동의 기쁨을 누린다. 그 맛은 오래 씹어야 알 수 있는 밥의 맛처럼 아주 슴슴하게 감각에 스며든다. 타율노동으로 이러저러하게 가시 가득 돋친 마음을 체에 치듯 툭툭 털어 곱게 만들어준다. 


요즘 새로 바에서 일을 시작하며 설거지, 음식 조리를 하면서 생각한다. 이것은 자활노동인가, 타율노동인가? 물론 엄밀히 말해 타율노동이지만, 나는 얼핏 자활노동의 형태를 갖춘 일들을 하면서 마음의 고요를 되찾는다. 그러면서 집안의 자활노동은 애인에게 부담하게 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유로 자활노동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그저 가부장적 가족의 관례를 답습하는 데에 몸이 익숙해졌거나, 타율노동과 자활노동을 모두 거의 하지 않을 만큼 부유하거나, 혹은 자활노동의 모습을 띈 타율노동을 너무 많이 하거나, 아니면 자활노동의 터전을 아예 잃었거나. 그 모두에게 한 스푼의 자활노동을 넣어 깨끗하게 세탁하는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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