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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Dec 05. 2022

라이터스 블록, Writer’s Block

쓰는 게 힘들어질 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는 거의 매일 아침 글을 쓰고 있다. 첫 해는 A4 한 장 쓰기, 이듬해는 천 단어 이상 쓰기를 목표로 썼다. 3년이 넘었다. (올해는 책을 내느라 많이 쓰지 못했지만.) 아침에 글을 쓰고 나면 뭔가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해냈다는 마음에 뿌듯해지곤 했다.


 뭐든 썼다. 읽은 것에서, 생활 속에서, 기억 속에서, 들은 이야기들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어떤 상황이든 글과 연결되곤 했다. 대단하지 않은 일들이지만 어쨌든 썼다. 쓰는 대로 바로 공개하는 글은 아니기에 만족할 만한 글을 자주 쓰지는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노트북을 펼치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서 글을 써나가라고 깜박이는 커서가 내게 신호를 줬다. 깜박깜박깜박...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그때, 드는 생각. 작가들에게 찾아오는 그 ‘검은 시기’가 내게도 오는 것일까. 라이터스 블록이 내게도? 그런 생각이 미치자 조금 겁이 났다.


글을 쓴 지 10년째. 그나마 매일 쓴 것은 겨우 3년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매일 쓰는 일이 7-8년이 넘어야 그런 일이 오지 않을까. 조셉 콘래드가 블록을 겪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난 매일 아침 경건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는다네. 그렇게 매일 8시간을 앉아 있지. 그리고 그게 다라네. 그 8시간 동안 고작 세 문장을 쓰고는 이내 절망에 가득 차 책상을 떠나고 말지.

어떤 때는 머리를 벽에 찧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마음을 다스리고 자제하는 데 온 힘을 쓴다네. 입에 거품을 물고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아이가 깰까 두려워, 아내가 놀랄까 두려워 감히 그렇게 하지도 못해. 절망으로 가득 찬 위기가 지나고 나면 몇 시간 동안 꾸벅꾸벅 존다네.
하지만 그럴 때도 쓰지 못한 얘기가 있다는 걸 항상 의식하고 있지. 잠에서 깨면 다시 글을 쓰려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진맥진해 침대로 돌아온다네. 날짜는 가는데 아무것도 쓴 게 없어. 밤엔 잠을 자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 또 헛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무력감에 겁이 난다네...     
아마도 나는 문체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듯해. 그리고 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고 있지. 쓰지 못한 이야기는 내가 보는 것, 내가 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읽는 책 한 줄 한 줄마다 스며들어 있어. 난 뇌를 느낄 수 있네. 내 머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내 이야기는 마치 유체와 같아 자꾸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네. 그걸 잡을 수가 없어. 바로 내 머리에 있고 곧 폭발할 것 같지만 한 줌의 물을 쥐듯이 그렇게 낚아챌 수가 없군......     
그렇다고 느린 것은 아니라네. 내용물은 속도를 내어 쏟아지지. 나는 언제나 이를 받아 적을 준비가 되어 있네. 하지만 문제는, 너무 자주, 너무 슬픈 일이지만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라네. 문장을, 단어를...... 가장 큰 문제는 전혀 글을 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내 상상력만큼은 아주 활발하다는 걸세. 한 단락, 한 페이지, 하나의 장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네. 모든 게 거기 있지. 묘사, 대화, 생각, 모든 것이. 단 한 가지 없는 것이라면 바로 확신과 믿음이야. 종이에 내 펜을 가져가게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확신과 믿음이...... 마음과 심장이 아파올 때까지 책에 대해 생각하네. 그리곤 힘이 다 빠져 침대로 돌아오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로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쏟아부은 노력이라면 응당 산처럼 거대한 명작이 탄생돼야 하지만 그 결과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네.   
                                 
    - 조셉 콘래드가 작가의 블록을 겪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   

       

 블록은 아니다. 감히 블록이라고 할 만큼 나는 대단한 글을 쓰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저 잠시 슬럼프일 게다. 뭔가 고갈되는 기분. 내 안에 저장된 재료가 적다는 말이다. 다만 감성이 줄어드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작년에 써 놓은 글과 재작년에 써 놓은 글에 드러난 비슷한 상황도 확실히 뭔가 언어가 줄어든 느낌이 든다. 그동안 많이 읽고 많이 썼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더 생각이 깊어지고 언어들이 새로워져야 하는데 뭔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일까.

     

 8년을 매일 썼다는 김연수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길 바라면서 썼다고 한다.

“날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고 가장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일을 매일 연습한 셈이니까. 그 연습의 결과 나에 대해 나의 꿈에 대해 나의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던 습관이 사라졌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쓰라, 날마다 쓰라.”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자신에게 말하고 그건 생각으로 들리고 눈으로 읽힌다. 우리가 쓰는 글은 곧 우리가 듣는 말이며 우리가 읽는 책이며 우리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쓰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날마다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 김연수의 글에서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야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하루 세 시간씩 투자해서 일만 시간이 조금 넘는 시기다. 1만 시간의 법칙. 올해로 글을 쓴 지 10년이 되지만 아직도 나는 글을 쓰는데 ‘전문가’의 수준을 도달하기에는 멀고 멀어 보인다. 김연수의 말처럼 글은 좋아지는지 알 수 없으나 조금씩 달라지는 나를 알게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글을 쓰면서 하루하루 나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어렸을 때 일기를 쓰면 월요일마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조회대에 올라가 일기를 발표했다. 나는 여러 번  발표했지만 어떤 글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 눈에 띄게 엄청 꾸미고 사탕을 발랐을 것이다.  상을 받기도 했다.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였다. 얼마나 매끄럽게 글을 지어내는지를 경주하는 대회였다. 6학년 어느 날, 극본을 써서 아이들과 연극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엄청 칭찬을 하셨다. 그때 나는 글을 잘 쓰는 줄 알았다.


 국민학교 때 쓴 일기장 여러 권이 어딘가 있었다. 창고를 새로 넓히면서 내가 쓰던 방도 다시 정리했다. 그것을 찾는 나에게, 아버지는 그때 잡동사니들을 과수원에 가져 가 태울 때 들어갔나 보다, 하셨다. 내 어린 인생이 불에 활활 타버린 것 같았다. 제대로 간직하지 못한 내 불찰이다. 어릴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너무도 궁금하다. 엉터리 일기였지만 거기엔 진실이 있을 것이었다. 당시의 디테일한 상황이나 그 나이만큼 세상을 보는 눈이나 관계들에 대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이제 읽어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중학생이 되었고, 초등학교 때 쓰던 일기도 중단되었다. 문예행사에서 한 두  번 상을 받은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독후감 행사나 문학 행사가 있었으나 나는 참가한 기억이 없다. 어느 날 교지에 실린 <어린 왕자>를 읽고 쓴 독후감 대회 대상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읽고 나는 완전히 주눅이 들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심오? 하게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아예 행사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발령을 받았고 아이들 글이 좋아서 일기에 조금씩 댓글을 달아주거나 시도 외우게 하고 주말에 작은 이야기 한 편씩 복사해주고 읽고 생각을 쓰는 글쓰기 숙제도 내주었다. 내 방 책꽂이에 읽은 책이 꽂이는 것이 늘어날수록 기분이 좋았다. 그때부터 다시 글을 썼다. 동시를 써서 응모하기도 했다. 양념을 잔뜩 바른 글은 당연히 뽑히지 않았다. 일기는 자주 썼다. 교단 일기도 가끔씩 썼다. 그러면서도 본격적인 글쓰기를 자꾸 미뤘다.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언젠가는 쓰리라. 그 마음만 있었다.


결혼하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을 키우며 육아일기도 써야 했다. 점점 써야 할 것들은 많아졌지만 시간이 없었다. 그것을 다 소화할 정도로 나는 부지런하지 못했다. 육아일기도 겨우 아이들이 서너 살 될 때까지 드문드문 썼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나는 살림과 육아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손을 댔다. 골프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춤도 배우고... 하지만 그것들은 한순간 기분으로 흘러가고 나를 기쁘게 하지 못했고 오래가지 못했다.


오십이 넘어 친구의 권유로  글이 작은 문학상에 당선이 되었고 심사하신 선생님의 추천으로 문학수업을 받게 되었다.  것이 많았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5 안에 책을 내라던 그분의 말이 자꾸 마음의 짐이 되었다. 글공부를 시작하고 7년째 되는  책을 냈다. 그동안 조그만 상도 받고 원고 청탁도 받고 창작지원금 혜택도 받을  있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허탈해지고 여전히 쓰기는 어렵다.



글쓰기가 너무너무 재미있기를... 막 글을 깨우치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1학년 어린이 글





 

 <축복>, <밤에 우리 영혼은> 등을 쓴 켄트 하루프는 일주일에 칠 일간 글을 썼다. 1943년에 태어나 2014년에 죽을 때까지 여섯 작품을 썼다. 소설을 쓰는 사람 치고 많은 작품을 쓴 것은 아니다. 그토록 쓰고 또 쓴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장 하나하나를 세심하고 꼼꼼하게 고쳐 쓰고 다시 썼다. 영감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런 것이 오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작가란 ‘모든 사람에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관심을 갖는 사람, 뻔뻔하게 엿듣는’ 사람이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작가 지망생에게 그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길은 엄청나게 읽고 끊임없이 쓰는 것."

"Read, read, read, read. Then write, write, write."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는 글은 많고 많다.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헤엄치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썼다.”

                                                                                                   - <긴 호흡> p47



그렇게 필사적으로 읽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내게 작가의 블록 순간이 오기는 와 봤으면 좋겠다.

그 말은 그것이 올 동안 치열하게 썼다는 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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