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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설자 Jun 22. 2024

달콤한 과즙을 빠는

          

 나는 잠만보다.

 장난 삼아 체로키 인디언 이름 짓기 식으로 지어 보았더니 '맨날 잠자는 조용한 늑대' 란다. 나름 일리가 있다. 침대에 누워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있으려나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다. 자기 전에 좋은 일을 생각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믿기에 되도록 좋은 생각만 하려고 한다.

 

 부모가 되자 아이들 일이나 자질구레한 일들로 잠을 설치는 일이 많았다. 잠자리에 누우면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애들 치과도 가야 하는데, 이번 달 학원비가 만만치 않은데, 공개수업은 뭘로 하지? 우리 반 00이 그 녀석은 요새 왜 그렇게 내 신경을 긁어댈까...’  눈은 더 또렷해지고 천정에서 온갖 걱정거리가 뚝뚝 떨어진다. 몇십 분을 뒤척이다 잠이 들면 어느새 여섯 시가 되고 어김없이 알람 소리가 무섭게 달려와 나를 잡아끈다.


 몽롱한 눈으로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와이셔츠를 다리고 아침을 준비한다. 왜 아침마다 와이셔츠를 다렸는지, 살림을 할 줄 몰라서였다.(나중에야 주말에 한꺼번에 다려놓았다. 그걸 왜 내가 했나 몰라. 나중에는 남편이 다렸다. 진작 그렇게 할걸.) 혼이 날아가게 일을 해치우고 깔끔하게 세팅한 아침을 차린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면 아이들을 깨워 영어 방송을 듣게 하면서 아이들 먹을 것을 준비한다. 방송을 잘 듣고 있는지 가보면 책을 놓고 졸고 있다. 다시 깨워 놓고 조리대로 와서 지지고 볶고 끓는 무언가를 젓는다.


 늘 잠이 부족했다. 점심시간에 아이들을 운동장에 보내고 의자에서 잠깐 쪽잠을 잔다. 일기장을 확인해 주어야 하고 할 일이 많아 5분 이상 자지 못한다. 그 5분이 참 맛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잠깐 자고 나서야 원기가 돌아와 집안일을 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잠이 부족한 것도 고통이지만 아이들을 깨우는 일이 정말 힘들었다. 잠이 많은 청소년기. 억지로 깨우면 기분을 망쳐 공부에 방해가 될 까봐 전전긍긍했다. 생각다 못해 사과 한쪽을 갈라 입에 물려주면 우적이면서 깨곤 했다. 사춘기를 지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사과로 깨우기'는 아주 요긴한 방법이었다. 대학생이 되자 해방이었다. 내쳐 자도록 내버려 뒀다. 수업에 늦거나 심지어 강의를 빼먹어도 그냥 두었다.


 3년 동안 새벽기도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절에 가서 법회를 보고 여섯 시에 집에 와 수험생들을 챙겼다. 아들이 재수하던 해에는 절에 다녀오고 아이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에 와 출근을 했다. 아침마다 영동대교를 두 번씩 넘나들며 정신력으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잠을 적게 잔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직장에 결근 한 번 한 적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알람이 제일 무서웠다. 잠귀신이 산처럼 내 눈을 누르고 있는데 강제로 나를 잡아당기는 알람소리.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막 꿈속에서 귀한 어른에게 다섯 항아리를 받고 거기에 넣을 보물을 받으려는 순간에 그만 알람이 방해를 하고 만다. 너무나 아쉬워 다시 눈을 감고 그 상황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꿈속에서도 시간은 이미 흐르고 만다.


 매일 강압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끝날 것 같지 않던 세월이 막을 내리고, 아이들이 독립해 저들의 삶을 찾아 떠나자 알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모든 시계의 알람을 해제하자 진정한 자유가 찾아왔다.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마음 놓고 잘 수 있다. 출근하지 않으니 뭔가를 하다가 밤이 늦어도 상관없다. 점점 생활이 불규칙해지고 아무 때나 일어난다. 이제 알람이라는 무서운 거인이 나를 누르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알람이 깨우던 근처가 되면 눈이 떠진다. 오랜 세월 길들여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형벌은 얼마나 끔찍한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다 보면 그렇게 죽음 같은 환경이어도 잠을 자는 시간에는 현실을 잊고 '수용소에 오기 전의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어서, 아니 꿈조차 꾸지 않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새벽 점호를 알리는 무시무시한 호각 소리가 들리면 다시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오지만.


 이제는 덜 자거나 더 자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강제적인 이유로 잠을 통제받는 사람들이 있다. 쏟아지는 잠을 억지로, 고통스럽게 이겨내야만 하는 사람들. 통제된 시간일지언정 자는 동안은 꿀잠이 되길 바라게 된다.


“내게 잠이란 신선한 과즙을 담뿍 머금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과일과 비슷하다. 이불 속에 들어가 ‘잘 먹겠습니다’ 하는 기분으로 눈을 감고, 그 잠의 과즙을 쪽쪽 빨다가, 다 빨아먹고 나면 눈이 뜨이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속에 잠에 대해 말한 이 문장을 읽자, 나도 모르게 오렌지 주스가 입안에 고인 듯 새콤달콤해진다. 글을 쓰다 보니 하품이 나오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슬슬 이불속으로 들어가 '잠의 과즙을 쪽쪽 빨아먹'어도 될 시간.    

                               

  

우리 집 잠만보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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