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이어도 딸은 딸이다

19.01.28(월)

by 어깨아빠

오후쯤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시윤이 한 시간 넘게 현재까지도 안 자고 있음]

[정말 참다 참다 화나서 혼자 자라고 하고 나옴]

[근데 소윤이가 집 이렇게 치워 놓음]


아내가 함께 보내준 사진에는 집안 곳곳의 깔끔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내가 시윤이 재우느라 씨름하는 동안 소윤이가 집 정리를 했다는 거다. 심지어 청소기도 돌렸단다. 테이프 찍찍이로 머리카락도 다 치우고, 현관의 신발도 다 신발장에 넣어 놓고.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엄마 나오려면 아무래도 한참 걸릴 거 같아서 엄마 힘들게 무리하지 말라고 그랬다면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단다.(가공된 언어가 아닌 소윤이의 워딩 그대로에 가깝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하던지. 다시 한번 딸을 키울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당장 가서 막 안아주고 칭찬해 주고 싶은 걸 통화로 대신했다.


누나의 바다 같이 속 깊은 행동과는 반대로, 시윤이는 끝끝내 낮잠을 거부하고 사상 초유의 낮잠 통과 사태를 발발시켰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윤이가 낮잠을 넘어간 건 태어난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과연 밤잠 잘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가 안 잔다는데.


아내는 시윤이한테 양심을 찾았다.


[근데 강시윤은 진짜 양심도 없다]


시윤이와의 씨름 후 거실로 나온 아내가 깨끗해진 집 말고 또 뭔가 하나를 발견했다. 보험설계사가 보낸 한과가 있었는데, 상자 안에는 한과가 한 개씩 개별포장이 되어 있었다. 아내가 무심히 상자를 봤더니 조금 뜯어져 있길래 소윤이한테 물었다.


"소윤아. 저게 왜 뜯어져 있지? 소윤이가 먹었어?"

"응. 내가 먹었어"

"아. 그래? 그럼 껍질은 어디 있어? 쓰레기봉투에 버렸어?"

"응"


그냥 하나 꺼내 먹었나 보다 했는데, 나중에 쓰레기 봉지를 봤더니 한과 껍질이 다섯 개나 있길래 또 소윤이한테 물었다.


"소윤아. 이거 다섯 개나 먹었어?"

"응. 다섯 개"

"왜 이렇게 많이 먹었어?"

"아니. 한 개만 먹으려고 했는데, 먹다 보니까 자꾸 또 먹고 싶은 거야"

"소윤이 그거 치우려고 청소한 거 아니야?"

"아니야아"


오늘 여러모로 아내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원래 아내가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약속이 내일로 미뤄졌다고 했다. 약속은 미뤄졌으나 아내의 자유시간은 별개로 보장해주고자, 퇴근하는 길에 통화하면서 오늘도 나가라고 했더니 애들이 이런 상탠데 어떻게 나가겠냐며 사양했다. 다른 얘기를 좀 하다가


"여보. 아니면..."

"여보. 여보. 잠깐만. 잠깐만"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


나의 '아니면'만 듣고도 아내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예상을 했던 거다. 나도 아내의 '잠깐만'만 듣고도 아내가 뭘 하려는지 알았던 거고. 부창부수가 따로 없구려. 소윤이도 들을 수 있도록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던 아내가 보안 유지를 위해 스피커폰 모드를 껐다.


"어. 여보. 이제 말해 봐"

"아니면 애들 누우면 인사하고 나가라고"

"그래"

"뭐야? 좀 전까지만 해도 거절하더니"

"예의상 거절한 거지"


오늘도 아내와 아이들의 상태가 괜찮았다.(여기서 '상태'라 함은, 전반적인 감정의 상태 및 집안 분위기 등을 종합해 이르는 말이다) 낮잠을 거른 시윤이도, 아내가 말 안 해줬으면 눈치 못 챘을 정도로 멀쩡했다. 낮 시간의 선행을 치하하는 의미로, 편의점에 들러 소윤이 선물을 하나 샀다. 칙촉 하나. 한 상자 말고, 낱개 하나. 비용 대비 소윤이의 만족도가 아주 높은 선물일 것 같았는데, 역시나 소윤이는 매우 즐거워했다. 저녁 먹기 전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어제처럼 열정적으로 놀았다. 저녁 메뉴는 파스타였다.


시윤이는 처음에 한 10분 열심히 먹더니, 그때부터 신호가 왔다. 숟가락질을 멈추고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다가 느릿느릿 꿈뻑거렸다.


"시윤아. 밥 먹어야지"

".....(꿈뻑꿈뻑)"


밥 먹다 조는 걸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결국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아내에게 안겨 씻으러 갔다. 씻고 났더니 정신을 좀 차렸는지 다시 거실을 활보했다. 역시 졸릴 때는 찬물 세수가 최고지. 소윤이도 씻겨서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요즘 소윤이가 가장 즐거워하는 숨바꼭질을 세 판 했다.


"자. 세 판 끝. 아빠 나 약속 잘 지키지?"

"응. 소윤이 최고야"


책 두 권을 고르랬더니 자꾸 세 권이 읽고 싶다길래 오늘은 두 권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시윤이한테 가서는


"시윤아. 너는 이거랑 이거 중에 뭐 읽고 싶어? 두 권 골라 봐"

"아빠. 내가 고른 거 두 권이랑 시윤이가 고른 거 두 권 읽어주면 되겠다여"


내가 막 웃었더니


"아빠. 왜 웃어여?"

"그냥. 소윤이가 꼼수 부리는 게 웃겨서"


자기도 민망한지, 화장실에 오줌 싸러 갔다. 애들은 금방 잤다. 아내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이것도 여보한테 떠넘기려다가 너무 비양심적인 것 같아서"


그래. 잘했어. 여보. 어제 목사님 말씀 들었지? 그리스도인은 그날의 은혜로 그날을 사는 거야.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가 없어.


참된 부부도 마찬가지지.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사는 거지. 어제의 축구로 오늘을 치환하려고 하면 안 돼.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지. 미뤄진 자유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보너스로 주어진 은혜로 오늘을 살아야지.


여보. 우리는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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