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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nBoulot Mar 29. 2019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한 윤리적 준칙

“Credo Quia Absurdum”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 이 문장은 중세 가톨릭 신학의 주요 교부 중 한 명인 테르툴리아누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런 격언이나 표어들이 언제나 그렇듯 정확한 원문은 다소 다르지만(주1). 종교적 반지성주의가 의심되는 이 문구를 접하면 항상,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음에도) 실은 이게 진짜 뜻하는 게 뭐냐면 하면서 변명하고 싶어 진다. 그것은 내가 서양철학사의 성령이 임한 가톨릭교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부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이론적이고, 후자는 실천적이다.


우리 부부는 심하게 관념론적이었고, 그런 주제에 유명론적 관점도 지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사랑해”라고 서로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 고로 연애 초기 우리가 무척 골몰한 주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우리 둘 다 마뜩한 의미로, 그럼에도 어쩐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느낌이 들도록 정의하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꽤나 피곤한 혹은 한가한 연인이라고 느끼겠지만 골수 관념론자인 우리에게는 관계를 걸고 도전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작업이었다. 우리는 과연 서로에게 같고도 적확한 의미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을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참고문헌을 총동원했다.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말하지 않음으로써 언급되는 사랑들’을 비롯해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 이 책은 결혼 후 짐을 합칠 때 똑같이 갖고 있던 책 중 하나였다 -  에서 정교하게 묘사한 구조적인 행태들, 이 주제에 있어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진짜 “바이블”에서 설파하는 사랑, 사랑과 성에 대한 미시 역사서는 물론이고 사랑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기반이 되어줄 인식론들까지. 물론 읽지는 못하고 제목과 한 줄 요약만 아는 문헌들이 다수인 데다 만약 읽었다면 그것이 오독임이 분명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언급했다고 전해지는 만족스러운 문장을 찾아냈다.


“사랑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라캉이 자신의 세미나에서 언급한 다소 냉소적인 정의(“L'amour, c'est offrir à quelqu'un qui n'en veut pas quelque chose que l'on n'a pas.” 사랑은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원치 않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다.)을 이해 가능하지만 오해 가능하도록 바꾸어놓은 문장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정말이지 원치 않는 무엇인가를 받고 그것을 황금으로 만들지 않던가.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가난한 부부가 자신의 시계를 팔아 산 빗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산 시계줄의 선물교환이다.


왜 사랑이 드라마의 주제가 되는가? 사랑 자체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것 외에 드라마가 되는 것은, 외계인의 침입, 귀신의 출몰, 자연재해, 미친 과학자의 지구 정복 시도, 악당 정치인의 선전포고처럼 기존 세계를 깨고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저 바깥의 무엇들이거나, 최초의 여성 비행사, 장애를 딛고 이루는 성취, 열대지역 운동선수들의 동계올림픽 도전처럼 기존 세계에 균열을 내며 새로 자리를 마련하려는 안쪽의 무엇들이다. 즉, 드라마의 모든 원천은 기존 세계의 붕괴다. 사랑은, 그것을 두 사람 사이만으로 한정 짓더라도, 앞선 드라마의 원천 둘 모두에 해당한다. 내 잿빛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네가 균열을 내고, 나는 용감하게도 이 세상의 균열에 몸을 싣고 그 안에 새로운 ‘우리’의 세상을 쌓고자 한다. 그러므로 철학자 바디우의 말마따나 사랑은 ‘둘의 탄생’이며 ‘혁명적 참여’다.


세계를 깨고 새로 만드는 것은 곧 나를 부수는 것이고 나를 새로 빚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노래하지만 사랑을 하는 것은 정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동적이지만 사랑을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 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내가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을 모두 던질 것을 요구한다. 해리슨 포드의 젊은 시절을 아는 아재들은 기억하겠지만, 세 번째 인디아나 존스 영화인 ‘최후의 성전’에서 성배로 가는 세 번째 시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디는 낭떠러지 앞에서 눈을 감고 나직이 말하며 허공에 발을 딛는다.



“믿음의 도약.”(주2)


불가해한 요구, 불합리한 선택. 이 개명된 세상에 이리 야만적인 계시라니. 그러나 우리는 극단적으로 그 가능성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다. 더 이상 스스로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갱신하지 못하며 이를 자신의 주변 세계에 채워 그 안에서 안전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 꼰대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신념과 행위는 합리적이기 그지없다. 이를 위반하거나 공격하는 사건들은 너무도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어떤 합리적인 세계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 합리성의 결과이거나 합리성 바깥의 충격이므로 당연히 기존 합리성 내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외계인의 침공은 기존 지구의 무기체계로는 해결할 수 없고, 약팀은 강팀과 같은 전술로 강팀을 잡을 수 없다. 반증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야말로 반지성주의적이다. 힌두교에서 가장 위대한 신은 누구인가? 바로 파괴를 관장하는 시바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인 사랑은, 무엇인가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며 파괴하는 것이다.(주3)


사랑하기를 멈추면 꼰대가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정의한 뒤, 그러므로 사랑에 입각한 나의 윤리적 준칙은 바로 테르툴리아누스의 저 문구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숭고한 준칙의 실천적 용례는 다음과 같다. 만약 아내가 길에서 고양이를 데려왔다면, 또 그 고양이가 당신이 아끼는 시계를 떨어뜨려 깨트렸다면, 또 그런 주제에 새벽부터 밥 달라고 울어대면, 당신이 믿는 신의 이름, 혹은 단지 사랑이라는 말에 기대 다음과 같이 고백하라.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




(주1)

원문:

Crucifixus est Dei Filius, non pudet, quia pudendum est;

et mortuus est Dei Filius, prorsus credibile est, quia ineptum est;

et sepultus resurrexit, certum est, quia impossibile.

— (De Carne Christi V, 4)

"The Son of God was crucified: there is no shame, because it is shameful.

And the Son of God died: it is by all means to be believed, because it is absurd.

And, buried, He rose again: it is certain, because impossible."


(주2)

Leap of Faith, 쇠렌 키르케고르의 용어라고 한다. 형제단처럼 종탑 위에서 뛰어내릴 필요는 없다.


(주3)

초기 사랑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에게 일종의 바탕을 마련해준 인식론은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었다. 아내는 전공 상 미학자로서 그를 읽었었고, 당시 백수였던 나는 헤겔의 광기에 겁먹어 있었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완성이 아니라 파괴와 재탄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아마도) 함축하는 “부정변증”이라는 기표는, 우리의 결론을 일찌감치 예정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이런 걸 보면 기적이란 것은 나중에 뒤돌아봐야 정말 종종 은총처럼 나타나는 것 같다.


왜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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