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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임계장 이야기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by 말로

우리 아파트 재활용 배출 요일은 화요일과 수요일이다.

화요일과 수요일만 되면 아파트 주차장 한편에 재활용 쓰레기 장터가 만들어진다. 특히, 배출 마감 요일인 수요일 저녁이 되면 플라스틱과 종이를 담는 포대는 산이 된다. 그 산 위에 던져지지 못했거나 바람에 날린 재활용 쓰레기들은 결국 길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만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휙 하고 던져놓고 간 플라스틱 재활용을 주워 정리하고, 펴지 않은 채 슬쩍 두고 간 종이박스를 일일이 펴서 정리하시는 분들은 경비원이라고 불리시는 어르신들이다.

경비원이라 불리지만 쓰레기 분리수거를 비롯하여 음식물 쓰레기통 세척, 폐기물 단속, 화단 정리, 도로 청소, 주차관리, 택배 관리 등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일은 모두 그분들 차지이다.

국어사전 어디에도 경비원의 정의가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동안 이것들을 당연시했거나 무시했을까?


이 책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후마니타스/2020)는 우리 주변에 늘 계신 분들의 이야기이며, 우리 부모님 이야기이며, 그리고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임계장'이라는 말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는데, 누가 처음 내뱉었는지 몰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어르신에 대한 깔봄이 깔려있는 참 고약한 말이다.

이 책을 쓰신 조정진 어르신(63세이시면 나한테는 형님이 더 가까울 것 같다.)은 38년 동안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시다가 퇴직하시고 생계와 아들의 남은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임시 계약직' 시장에 자신을 내놓으셨다. 동명 고속(가명)이라는 버스 회사의 배차원으로, 노을 아파트(가명)의 경비원으로, 대형빌딩의 주차관리원으로, 터미널 고속(가명)의 경비원으로 지낸 3년간의 노동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담아냈다.

저자는 터미널 일 하면서 주변에서 '임계장'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처음 듣게 된다.

터미널 사람들은 나를 '임계장, 임계장' 하고 불렀다. 내 공식 직함은 '영업부 배차 계장'이었다. 처음에는 성씨를 잘못 알아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난 '임 씨'가 아니고 '조 가'라고 말하곤 했다. (중략) 알고 보니 그건 배차 계장이라는 내 직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호칭이었다. '임시 계약직'이라는 말에 노인 '장'을 하나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세상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가 접한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매연과 미세먼지, 그리고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이 일하는 동료 10명과 터미널 공용 화장실 코 앞에 있는 공동 숙소에서 몇 년째 교체하지 않은 공동 침구를 덮고 지내는 등 1인당 GDP 3만 달러를 넘는 한국 사회의 틈새는 더럽고 끔찍했다.

이런 물리적인 업무 환경보다 그를 더 괴롭힌 것은 노동을 둘러싼 사람들이었다. 그를 임시 계약직으로 고용한 회사, 아파트 관리사무소 그리고 아파트 주민들과 빌딩 입주 직원들이 행하는 갑질은 똥물로 들어찬 아파트 지하실을 청소하는 것보다 그를 더 힘들게 했다. 결국 일하다 다치거나 아프게 되면 회사는 치료보다는 당장 일할 수 있는지 확인부터 했고, 그가 그들에게 더 이상 쓸모없는 소모품이라 판단되면 병상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세상에는 일자리가 절실한 사람, 어리숙한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신참들이 널려 있다고 회사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신참들이 우리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책의 무게와 상관없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

저자가 일했던 아파트의 선배 경비원이 그에게 한 충고였다. '사람'이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는 도대체 얼마나 잔인한 사회인가? 잔인한 사회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꼴 같지 않은 인간들로 채워진 사회이다.

자신의 차량을 불법주차로 단속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협박하는 본부장 사모. 갑자기 나타난 길고양이 때문에 자신의 딸이 다쳤다고 경비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배상을 요구하고 자신들이 만족할 때까지 계단에 서서 경계 근무를 서게 하는 아파트 주민. 자신이 지시한 대로 화단에 호스로 물을 주지 않고, 양동이로 물을 줬다는 이유로 인민재판 식 징계위원회를 여는 아파트 자치회장 등. 사회적 약자들을 품지 못한 시스템의 빈틈을 자신들의 이익과 욕구 충족을 위해 이용하는 잔인한 인간들. 그들이 바로 우리 이웃이라는 것이 공포스러울 뿐이다.


이 책이 정말 무서운 것은 '임계장'이 나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보다 타인에 대해 무신경하고 몰상식한 모습이 나의 현재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인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가 자신의 가족들이 자신의 책을 보고 행여 마음을 다칠까 하는 걱정의 말로 끝을 맺는다.

정작 이 문장을 보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다.

이 글은 이 땅의 늙은 어머니, 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 보고자 써낸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


IMG_7031.jpg 우리의 시선은 이제 그들의 앞을 봐야 한다.

아파트 도로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빛을 내며 가을바람 소리에 그 잎을 떨구고 있다. 도로는 어느새 노란 블록을 깔아놓은 듯하다. 그 블록 위에 경비 어르신들의 빗자루질이 쉼 없다.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이 누군가에게 고된 노동이 될 뿐이다.

가마 타는 사람은 가마 메는 사람의 수고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잡담)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도저히 잡담할 기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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