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만 Sep 19. 2019

경주마의 삶, 산낙지의 죽음

Melbourne Cup day

멜버른의 11월, 여름이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앨리, 레나는 미얀마 식당에 있었다. 날이 따뜻해져서 길거리에 놓인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중 누구도 미얀마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미얀마 음식이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메뉴판이 외국어 사전 같았다. 언제나 용감한 레나가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뭘 먹어야 할까요?

점원은 커리와 볶음면을 추천했다.

커리요? 커리가 미얀마 음식인가요?

네.

점원은 짧게 대답했다.


채식주의자 앨리를 위한 비건 커리를 주문하고, 셀리악 증후군을 앓고 있는 레나를 위해 글루텐 프리 볶음면을 주문했다.


우리가 받은 음식은 인도식 커리와 태국식 볶음면이었다. 커리는 인도의 것보다 달달하고, 볶음면은 태국의 것보다 쌉쌀했다. 얼마나 맛있던지 우리는 호들갑을 떨면서 먹었다. 똑똑한 앨리가 지도를 보여줬다. 미얀마가 인도와 태국 사이에 있는 것을 나는 한참을 보았다. 세계는 얼마나 큰지.  


"경마는 어땠어?"

우리는 커리와 볶음면을 먹으면서 이틀 전이었던 Melbourne Cup 데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패트와 나는 경마 시합에 다녀왔고, 앨리와 레나는 가지 않았다.



Melbourne Cup은 세계 유일의 경마 시합 공휴일이었다. 그러니까 멜버른 사람들은 경마를 보기 위해 학교도 안 가고, 회사도 안 가는 거다. 여자들은 화려한 모자에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은 나비넥타이에 가슴팍에 장미꽃을 꽂고 경마장으로 향한다. 나는 이 이벤트를 몹시 기다려 왔다. 일찌감치 꽃과 깃털이 달린 모자와 등이 파인 드레스를 사놓고 말 그대로 손꼽아 기다렸다.


경마장은 늦봄에 만개한 장미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장미꽃 사이사이를 색색의 커다란 모자를 쓴 여자들이 스파클링 와인 잔을 들고 오갔다. 잡지 명품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던지, 패트도 나도 "예쁘다, 예쁘다"라는 말만 하면서 경마장을 오갔다. 2분 이내에 끝나는 경기는 총 9번, 40분 간격으로 열린다. 서너 개의 경기를 보고 오자고 말을 하면서도, 경기를 안 보는 40분 동안 뭘 할까 고민했었는데, 우리는 마지막 경기까지 다 보고 40분의 쉬는 시간에도 바쁘게 다녔다.


우선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음 경기에 오르는 경주마들의 목록을 살핀다. 보통 열다섯 마리 정도가 출전하는데, Ducal Castle이라든지 Felida, Le Roi, Tango's dauther 같은 우아한 이름들 중에 Alcohol, The Cleaner, Desert Jeuney 같은 무자비해 보이는 이름을 택한다. 말들의 기록도 살펴보고, 전문가들이 뽑은 우승 예상 경주마의 목록도 살펴보는데, 전문가들의 목록에 오른 말들을 제외시키는 것이 승률이 높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문가들은 언제나 쓸모없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에서나 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베팅을 하는 표를 사고 소시지나 치즈감자튀김 같은 것을 사고 맥주를 사고 나면 경기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는 잔디밭에 앉았다가, 트랙 가까이 섰다가, 2층 관람석에 올라갔다, 1층 관람석으로 다시 내려오는 식으로 경기마다 자리를 옮겼다.

경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경주마들이 결승선에 가까워지면 모두 엉덩이를 반쯤 들고 "Go, Boristar!" "Come on, Terravista!" 악을 쓴다. 말들은 윤기가 좔좔 흐르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갈기를 흩날리며 트랙을 질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감탄사가 나왔다. 경기가 끝나고 기수가 말에게 몸을 기울여 목을 툭툭 두드려주는 모습에서는 울컥하기도 했다. 기수는 경주마를 사랑하는 것 같았고, 경주마 역시 기수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나와 패트는 경마를 몹시 즐겼다. 한 게임도 빠짐없이 패트와 내가 찍은 말들이 선두권에 들었고, 나는 그때마다 미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왜 사람들이 경마에 미쳐 집을 갖다 파는지 알 만했다. 다행히 미치기 직전에 경기는 끝났다.



그러나 미얀마 식당에서 앨리와 레나와 함께 이야기한 것은 말을 향한 그 모든 감탄사와 빛나는 드레스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말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말의 삶.

한국에서 자라온 내게는 굉장히 낯선 단어의 조합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호주에서 살면서 놀란 것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동물의 권리에 대한 거였다.


호주에는 살아있는 동물을 요리하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법이 있다.

호주에서는 산 낙지도 불법이고, 입을 뻐끔거리는 머리가 같이 나오는 회도 불법이고, 살아 움직이는 게를 뜨거운 물에 넣어 삶는 것도 불법이다. 동물을 고통 속에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거였다. 도축장에서 소를 잡을 때는 아주 빠르게 단번에 죽여야 했다. (얼마 전 호주 정부는 한 동남아시아 국가에 더 이상 소를 수출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건 그 국가에서 소를 망치로 죽이는 동영상 때문이었다.)

계란은 free range 여부를 표시하게 되어 있었다. 호주인들은 닭장 안에 가두어놓지 않고 풀어놓고 기르는 닭의 삶을 존중했고, 가격이 더 비싼 free range 계란이 훨씬 더 많이 팔렸다.

그러니 경마에 있어서도 반대 여론이 강했다.


앨리는 경마 도중에 스트레스를 받아 관중석으로 뛰어든 말에 대해 말했고, 레나는 경주용으로 쓰이다 다리가 부러지면 죽임을 당하는 말에 대해 말했다.

"말에게도 삶이 있는 거니까. 행복하게 살 권리,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있지."


*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말들에 대해 생각했다. 초원을 뛰노는 대신 트랙을 돌아야 하는 말들에 대해. 빛나고 아름다운 경주마들 역시 지금 마구간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거였다. 말들은 꿈속에서 트랙을 달리고 있을까, 초원을 달리고 있을까. 경마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즐겁고, 동시에 불편한 마음으로 나는 잠에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모르는 호주의 여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