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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Kim Feb 17. 2020

눈이 내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여행을 다녀온 뒤에 늦잠을 실컷 잔 일요일이었다.

오늘 하루는 또 아이들과 어떻게 재미있게 보내나 궁리를 하며 내방에서 컴퓨터를 끄적거리고 있는데, 방문 밖에서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와, 눈이다, 얘들아 눈이다!"


지구 온난화 덕분에 그 어느해 겨울보다도 심심했던 이번 겨울이 마지막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올해 앞자리가 4로 바뀐 나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심드렁했다. 그깟 눈이 무슨 대수라고.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8살 아들과 5살 딸은 이미 눈을 본 강아지 처럼 거실바닥을 쿵쿵 찧으며 뛰고 있었다. 

"나가자, 나가자!"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나도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아이들은 스키장갑이 하나씩 있어서 눈을 실컷 만질 수 있는데, 젖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나에게는 얄팍한 운동용 장갑밖에 없었다. 이를 어쩌나..


주방에서 비닐장갑을 몇장 꺼내서 롱패딩에 쑤셔넣고, 장갑을 끼고,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시냇가에 가도 돌무더기를 쌓아서 물길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 레고를 뺏어서 로봇을 만드는 나는 눈을 봐서도 눈사람부터 생각이 났다.


설질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날씨가 충분히 춥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눈이 충분히 오지 않아서인지 쌓인 눈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혹시하 하는 마음에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 뒤쪽 다른 놀이터로 가보았는데,

다행이, 눈이 충분히 쌓여 있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눈을 좀 뭉쳐서 단단하게 만들고 굴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머리가 될 부분, 나는 몸통이 될 부분을 미친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5살 딸은 작업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눈사람을 만들어보려고 열심히 궁리하고 있었다.


20분이나 눈을 굴렸을까, 아들과 나는 추위도 잊고, 몸에는 땀이 날 지경이었다. 부끄러웠다. 왜 안나온다고 했지... 내안에 8살짜리 아이가 원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아들과 나는 몸통 눈덩이 위에 얼굴 눈덩이를 올려놓았다. 표면은 좀 울퉁불퉁했지만,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눈코입을 만들면 얼추 사람의 꼴이 나올 듯 했다.


그런데 놀이터 한쪽 켠에 있는 코딱지만한 아파트 정원에서, 한겨울에, 발견할 수 있는 나뭇가지란 없었다. 소나무 가지를 확 꺾을까 하다가, 그래도 내가 불교신자인데, 아이들앞에서 그럴수는 없다 하며 주섬주섬 머뭇머뭇거리며 땅바닦만 훑고 있는 찰라,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미 찢어져버린 비닐장갑과 그 안에 얄팍한 운동용 장갑을 벗고, 다소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밥 다 됐으니까 먹으러 들어와"


아, 이 눈사람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가야하는데.. 눈발은 갑자기 거세어져서 나와 아이들이 눈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사람 얼굴을 파서 눈코입을 대충 만들고, 돌멩이를 끼워서 아주 작은 팔을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눈사람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 같았지만, 쿨한 아들은 문제삼지 않았다.


아들을 눈사람 앞에 세워두고 얼른 사진을 찍고, 이제 가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딸이 자기는 눈사람을 완성하지 못했다며 버텼다. 눈사람은 커녕 아주 작은 눈뭉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내가 눈을 확 모아 눌러서 작은 눈덩어리를 만들었는데, 딸은 눈이 깨끗하지 못하다며 미니 눈사람인증을 거부했다.


지저분한 눈덩이를 집어서 깨끗한 눈에 후다닥 굴려서 대충 덮어서 보여주니 딸이 만족하였다.


그렇지만 딸은 눈덩이를 여기 두고 갈수 없다며 버텼다. 여기 두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눈은 다 녹기 마련"이라며 설득하였지만 딸은 막무가내였다.


'아, 그럼, 이 눈덩이를 집으로 가지고 가자, 냉장고에 넣으면 녹지 않는단다.' 딸은 그제서야 수긍하고 나는 딸을 안고, 아들의 손을 잡고, 급조된 미니 눈사람을 쥔 채 후다닥 아파트 출입구로 갔고, 눈사람이 된 아이들을 눈을 털어 다시 사람꼴로 만든 뒤 집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맛있게 밥을 먹었고, 밥을 먹고나서 놀이터를 바라보니 눈도 그치고, 이미 눈사람의 머리는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난 뒤였다. 나는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찾아와서 마음 한구석이 짠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딸은 내게 미니 눈사람의 안위를 확인시켜줄 것을 요구했고, 나는 냉동실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결국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보여달라고 한 것일까, 냉장고에 넣어두면 없어지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해서 보여달라고 한 것일까.


냉동실에 넣어두는 동안 미니 눈사람은 안온할 것이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 다 없어진다. 


색즉시공이다. 즉, 있는 것은 비어있는 것이다.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눈사람은 녹아서 물이 된다. 세상 다른 만물도 역시 다르지 않다. 눈사람이 눈으로 만든것이고, 눈이 녹으면 눈사람도 없어진다는 것은 잘 알지만, 책상이나 아파트를 보면 없어진다는 생각을 깜박잊고 영원할 줄 안다. 책상이나 아파트는 나와 비슷하게 살거나, 나보다 오래 사니까. 하지만 영원한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눈사람이다.


그래서 색즉시공은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설득한다.


그런데 색즉시공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공즉시색 이기도 하다. 흔히 색즉시공 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여덟글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온전한 어구이다.

공즉시색, 곧 비어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색즉시공 뒤에 공즉시색을 붙여놓은 까닭은,


비어있다는 것[공, emptiness] 또한 있는 것[색, form]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없는 것/비어있는 것에 집착하면, 있는 것/존재하는 것의 소중함을 가벼이 여기게 된다. 그래서 색즉시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뒤에 공즉시색도 붙여놓았다. 


눈사람은 물이지만, 눈으로 눈사람을 만드는 과정은 충분히 즐겁고, 그 즐거움도 소중하다. 눈이 오는 것은 대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밖에서 눈사람을 만드는 즐거움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다. 녹을 눈사람이니 부질없다는 생각이 눈 사람 만드는 즐거움을 잠식한다면 그 또한 집착이다. 


쿨한 아들은 창밖으로, 쓰러진 눈사람을 확인하고도 슬퍼하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보여달라며, 보고 즐거워하였다. 

눈사람이 안이뻐서 미안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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