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케 아니고 부캐입니다만.
여느 직장인처럼 토요일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이 제일 설레었다. 소위 불금. 친구들을 만나거나 집에서 맥주와 함께 금요일의 여유를 느끼며 나 혼자 산다를 보는 게 소소한 행복 중 하나인 전형적인 i. 적어도 영화 마케팅을 그만두기 전까진 그랬다.
대학교 때 영화관 알바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완벽한 극세권에 살고 있었다. 걸어서 10분 내 극장이 3곳이나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 되어 자연스럽게 영화관 알바를 하게 되었고, 매주 이렇게 많은 영화가 개봉했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관에 걸리지 않는 수많은 영화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영화제 자원봉사를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 역시 영화인을 꿈꾸게 되었다. 대단한 영향력이 아니더라도 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관계자. 난 큰 포부나 거창한 비전 같은 거와는 늘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소박하게 영화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관계자가 되었다. 지나고 보면 이때의 경험이 결국 꽃을 할 수 있는 씨앗이 되었던 것 같다. 결국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마는 집요함, 결과가 어떻든 내가 짊어질 책임이라 여기는 무던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존버하는 마음.
어느덧 직장 생활 7년, 그동안 몇 번의 이직이 있었고, 인생을 계획하며 살지 않았지만 이런 변화의 순간들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이직이 아닌 전직은 선택지에 없었는데,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직장이 아닌 직‘업’을 바꾸게 되었다. 그때 난 퇴사 1년 전부터 ’ 기술‘에 집착하고 있었다. 영화 홍보사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영화 광고를 메인으로 한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영화 하나씩 개봉시키고 나면 2-3개월은 훌쩍이고 순간순간 힘들더라도 다음 영화 준비로 잊어버리는-의 반복이었다. 무엇보다 보람이 있었다. 광고가 온에어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지만 그래도 걸린 걸 보면 뿌듯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잘만 가다가 코로나로 인해 계속 연기되고 준비하다 홀드 되고 갑자기 캔슬되는 게 반복되었다. 유례없는 워라밸이 생겨버렸고, 극 NF인 나는 진지하게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미루고 모른 척하던 ‘직장생활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같은. 영화 쪽에서 지금 광고주보다 더 나은 콘텐츠 IP는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난 광고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마케팅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는데 인풋을 위해 더 노력하지 않는 나 자신도, 유관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과 광고주의 무리한 요구에도 지쳐갔다.
이제까지의 업무 루틴은 영화가 개봉하기 전 전략 방향을 세우기 위한 수많은 회의(야근), 아이데이션, 유관 부서와의 협업, 그리고 광고주 피칭과 컨펌 등이었는데, ’ 혼자서도‘ 모든 걸 완성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영화만큼 재미있어야 했다. 재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고 싶은 동력이었으니까.
퇴사 후 꽃을 시작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다시 회사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말이면 새벽에 일어나 일면식 없는 사람들의 결혼식을 준비한다. 여전히 혼자 모든 걸 완성시킬 수 있는 기술은 갖추지 못했다. 그래도 무언가 만들어내는 과정이 흥미롭다. 단 몇 시간이지만 오늘의 주인공들을 위한 가장 완벽한 들러리. 그거면 충분하다. 직장인도 해보고 잠깐이지만 프리랜서(라 쓰고 알바생)도 되어보고, 결국 투잡으로 타협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서 일하는 게 과연 맞을지, 내가 온전히 모든 짐을 질 수 있는 성향인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