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중재 기관 by 김다애
앞서 중재의 선결 조건으로 당사자 합의를 언급한 바 있다. 중재 합의 조항은 결국 당사자 간의 계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중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당사자 자치 (party autonomy)를 꼽을 수 있다. 기관 중재의 경우 어떤 중재 기관을 이용할지에 대해서도 당사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보통 분쟁 해결 조항 내용에 분쟁 발생 시 이용할 중재 기관 및 규칙을 담는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중재 합의 조항이 있다고 해보자:
"All disputes arising out of or in connection with the present contract shall be finally settled under the Rules of Arbitration of the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by one or more arbitrators appointed in accordance with the said Rules."
"본 계약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모든 분쟁은 최종적으로 국제 상공 회의소의 중재 규칙에 따라 임명된 하나 이상의 중재인에 의해 상기 중재 규칙에 따라 해결한다."[1]
위 조항의 경우 분쟁 당사자가 중재 기관 및 중재 규칙으로 국제상공회의소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분쟁 당사자가 투자자와 국가인 국제투자분쟁(ISD)인 경우에도 양자간투자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의 중재 합의 내용에 따라 특정 기관을 선택해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미자유무역협정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는 11조를 통해 서로 다른 협정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ICSID) 또는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 United Nation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Trade Law, UNCITRAL) 중재 중 하나를 택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항은 국제협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에너지헌장조약 (Energy Charter Treaty) 제26조 (4)항은 투자자에게 분쟁 해결 가능 기관으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ICSID),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 (UNCITRAL), 스톡홀름 상업회의소 중재원 (Stockholm Chamber of Commerce Institute, SCC)의 중재 등 세 가지 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중재 기관은 당사자 합의에 따라 정해지는데, 어떤 중재 기관을 이용할지는 중재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각국의 대표적인 중재 기관의 특징 및 각 기관의 중재 규칙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분쟁 당사자가 이용할 수 있는 중재 기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세계 각국의 중재 기관의 수는 그 수가 매우 많아 정확히 파악된 바가 없지만[2], 중재 관련 업무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로펌 White & Case와 Queen Mary University of London의 School of International Arbitration이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는 설문 보고서를 참고하여 가장 대표적인 기관 몇 개를 살펴보고자 한다. 국제 중재 법률가, 중재인, 사내 변호사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 상기 조사에 따르면 선호도 1위부터 7위까지의 기관으로는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 London Court of Arbitration (LCIA), Singapore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re (SIAC), Hong Kong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er (HKIAC), Arbitration Institute of the Stockholm Chamber of Commerce (SCC), 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ICSID), American Arbitration Association - International Center for Dispute Resolution (ICDR/AAA)이 있다.[3]
이 중에서도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국제상공회의소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는 1919년 설립된 기관인데, 산하에 여러 전문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이 중에서도 투자 및 분쟁해결 관련 위원회가 가장 크다고 한다.[4] ICC의 중재법원은 1923년에 설립이 되었으며, 오래된 역사만큼 국제상사 중재에 있어서 권위 있는 기관 중 하나이다. 참고로 ICC는 위 언급된 설문 보고서에서 2006년, 2010년, 2015년에 걸쳐 장기간 선호도 1위 중재 기관으로 선정되었다.[5] 뉴욕, 홍콩 등 130개국에 지역사무소를 두고 있다. 주로 ICC 중재규칙이 제대로 이행되도록 중재 절차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며 설립 이후 2만여건이 넘는 사건들을 다루었다고 한다.
선호도 2위의 중재 기관인 영국의 런던 중재 법원(London Court of Arbitration. LCIA)은 1892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재 기관이다. 상거래에서 생기는 분쟁에 대해 포괄적인 상사 중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점차 국제투자분쟁으로도 그 영역이 확대될 전망이라고 한다. 일례로 협상 타결이 무산된 범 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 (Transatlantic Trade and Investment Partnership. TTIP)과 관련해서도 중재를 통한 분쟁 해결을 위한 중재 법원으로 LCIA가 거론되었다고 한다.[6]
선호도 3, 4위로 선정된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 (Singapore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re. SIAC)와 홍콩국제중재센터 (Hong Kong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re)도 중재 분야의 최근 흐름을 지속적으로 반영하면서 많이 발전해 온 중재 기관들이다. 예를 들면, 위 두 기관은 ICC, LCIA에 이어 글로벌 시장 경제에서 급증하고 있는 다수당사자 중재 (multiparty arbitration)를 다루는 내용의 중재 규칙을 마련한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또한 HKIAC는 최근 중재규칙을 개정하기도 했는데, 2018년 11월 1일부터 시행되는 2018 중재규칙에 최근 국제중재 분야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제3자 투자 (third party funding) 관련 규정을 포함하기도 했다.[7]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위 두 기관은 각각 1991, 1985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했으나 각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중재 산업을 키워왔다고 한다. 예를 들면, 홍콩 정부의 경우 HKIAC에 사무실을 무료로 제공해 HKIAC가 시설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인프라 구축에 힘쓸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중재기관보다 저렴한 대관료 등으로 경쟁력을 높인 HKIAC는 아시아 최초로 2009년 ICC 중재법원 아시아 지역 사무국을 유치했다.[8]
다음으로 스톡홀름 상업회의소 중재기관 (Stockholm Chamber of Commerce Institute. SCC Institute)은 1971년에 설립된 스웨덴의 주요 중재 기관이다. SCC의 경우 국제상사분쟁뿐만 아니라 투자분쟁도 다루고 있다. 참고로 다수의 국제투자분쟁 사건은 ICSID Convention, 그다음으로는 UNCITRAL 규칙에 의거하고 있는데, 앞서 LCIA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중재 기관에서도 국제투자분쟁을 조금씩 다루고 있다. 이는 BIT나 FTA 협약국이 1) ICSID 협약 미가입국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 또는 2) 협약국이 위 두 규칙 외의 다른 중재 기관 규칙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것에 동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에너지 헌장 조약에서 살펴보았듯이 SCC는 120개 이상의 BIT에서 분쟁 해결 옵션으로 언급이 되어있다.[9] SCC에서 유엔무역개발회의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의 자료를 바탕으로 발간한 2015년 보고서는 SCC가 ICSID와 UNCITRAL 다음으로 가장 많은 투자분쟁 사건을 다룬다고 소개한 바 있다.[10]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International Centre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ICSID)는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로 국제투자분쟁을 다룬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기관들과 구분될 수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의 2017년 보고서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국제투자분쟁 사건은 주로 ICSID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ICSID는 그만큼 공신력과 전문성을 갖춘 투자분쟁해결기관으로 알려져 있다.[11]
ICSID는 1966년 국가와 다른 국가 국민 간의 투자분쟁해결에 관한 협약 (Convention on the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 between States and Nationals of other States. ICSID 협약)에 의거해 설립이 되었다. ICSID협약 6조는 각 협약국의 대표로 구성된 ICSID의 Administrative Council이 중재에 관한 절차 및 규칙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는데, ICSID는 동 협약 제 44조에 따라 이러한 중재 규칙에 따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지난1967년에 제정된 ICSID 중재규칙은 현재 개정 과정에 있다. 또한 ICSID는 ICSID중재 규칙 외 UNCITRAL 중재규칙이나 임의중재를 바탕으로 하는 투자자-국가 분쟁 또는 국가 간 분쟁을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ICSID가 모든 국제투자분쟁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닌데, 이는 국제투자분쟁 사건이 ICSID에 회부되는 경우 ICSID 협약 제 25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관할요건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ICSID관할권은 추후 ICSID에 대해 따로 살펴보면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다음으로 미국중재협회(American Arbitration Association, AAA)는 국제중재센터 (International Centre for Dispute Resolution. ICDR)를 두어 광범위한 분쟁해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위 기관은 미국 의회가 연방중재법을 제정해 1926년에 설립한 비영리 공익기관인데, 뉴욕을 포함한 미국 전역에 지역사무소를 두고있다. 2015년에는 AAA-ICDR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 재단을 설립하여 별도의 펀딩확보를 통해 대체적 분쟁 해결의 활성화를 위한 대내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AAA는 또한 ICC, ICSID와 함께 1983년부터 매년 콜로키엄을 개최하고 있는데, 올해에는 제35회 콜로키엄이 12월 7일 워싱턴 디씨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대한상사중재원 (Korea Commercial Arbitration Board, KCAB)은 대한민국중재법(법률 제 1767호)에 의거해 1966년에 설립된 중재 기관이며 국내외 상거래 분쟁을 다루고 있다. 서울에 본원, 부산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최근 LA사무소가 세워졌다고 한다. 대한상사중재원은 지난 2015년부터 각국의 국제중재 전문가, 국내외 중재기관 관계자 및 이해관계자가 모이는 국제분쟁해결 세미나인 Seoul Alternate Dispute Resolution Festival (SAF)를 주최하고 있는데, 2018년 SAF는 11월 4일부터 9일까지 진행된 바 있다.
이처럼 다양한 중재 기관들이 있는데, 어떤 중재 기관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중재 절차 및 중재 규칙이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다수당사자중재 중 제3자를 당사자로 인정해 중재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joinder 규칙의 경우 LCIA는 보수적인, ICC는 중립적인, HKIAC는 보다 진보적인 중재규칙을 적용하고 있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ICC의 경우 이미 1998년 중재 규칙에서 다수당사자중재의 경우 중재판정부 구성 또는 중재인 선임 후 다수당사자중재 구성을 위해서는 제3자에 대한 당사자 적격여부를 판단함과 동시에 제3자를 포함한 분쟁 당사자 모두의 동의를 요구한다. LCIA의 joinder 규칙은 중재재판부 구성 이전에 제3자 동의를 요구함으로써 재판부가 제3자의 당사자 적격 여부를 판단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따라서 joinder절차가 다른 중재기관에 비해 어렵게
되어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 편, SIAC의 joinder 규칙에서는 당사자 동의가 필수요건이 아니어서 보다 쉽게 제3자를 중재에 참여시킬 수 있게 해놓았지만, 이와 동시에 중재재판부 구성이나 중재인 선임에 있어서 당사자 동의를 요구함으로써 당사자 자치 원칙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어떤 중재 기관을 선택하는지는 중재 절차 또한 궁극적으로는 중재 판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따라서 분쟁 당사자는 분쟁해결을 위해 어떤 기관을 택할지 결정함에 있어 각국의 주요 중재 기관의 특징과 각 기관의 중재 규칙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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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CC 표준 중재 조항
[2] 우리나라 국내에만 중재, 조정 관련 행정 기관 만해도 50 여개 이상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3] Paul Friedland & Stavros Brekoulakis, 2018 International Arbitration Survey: The Evolution of International Arbitration, https://www.whitecase.com/sites/whitecase/files/files/download/publications/qmul-international-arbitration-survey-2018-18.pdf.
[4] Patrick Zheng & Jason Fry, Introduction to ICC arbitration 1, Clifford Chance (Dec. 7, 2012).
[5] 보고서는 또한 설문대상자들이 다음의 중요도 순으로 1) 전반적인 인지도 (general reputation and recognition of the institution), 2) 업무 효율성 및 직원의 전문성 (high level of administration), 3) 기관의 경험치 (previous experience of the institution), 3) 중립성 및 국제성 (neutrality/internationalism) 등을 특정 중재 기관을 선호하는 이유로 꼽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6] 박은영. 런던국제중재법원 (LCIA)에 관한 소고. 중재논단 344호(2015,가을겨울).
[7] HKIAC의 2018 중재규칙 제44조는 투자를 받는 분쟁 당사자가 투자자의 정보와 투자금액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http://www.hkiac.org/content/2018-hkiac-administered-arbitration-rules HKIAC 2018중재규칙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hkiac.org/sites/default/files/ck_filebrowser/PDF/arbitration/HKIAC%20Rules%20-26%20Sept%202018.pdf
[8] SIAC과 HKIAC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사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비즈 "급부상한 싱가포르·홍콩...'정부 과감한 지원 필요'" (2017년 6월 25일)
[9] https://sccinstitute.com/about-the-scc/
[10] 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Fact Sheet. Arbitration Institute of the Stockholm Chamber of Commerce. https://sccinstitute.com/media/148946/investor-state-dispute-settlement-isds-_a5_ny-framsida.pdf
[11] World Investment Report 2017, UNCTAD https://unctad.org/en/PublicationsLibrary/wir2017_en.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