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과 같다. 언제 죽음이 문 앞에 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어떻게 현재의 삶의 잘 살아낼 것인가로 귀결된다.
카트린 셰러의 그림책 <사과나무 위의 죽음>은 여우 할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온 죽음을 사과나무에 붙여 놓고 더 오래 아주 오래 살다가, 본인이 선택한 그때에 죽음을 끌어안는다는 내용이다. 여우 할아버지는 죽음을 지연시키면서 처음 얼마동안은 더 누리게 된 삶을 즐겁게 누렸다. 그러다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의 죽음을 먼저 접했고 슬퍼했다. 죽음에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했지만, 죽음의 대답은 참 간단하다. '묶어둔 것은 당신만의 죽음이라고.' 산 자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오만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우 할아버지는 오래 더 오래 살다가 몇 대를 거쳐 자식, 손주들은 더 많아지지만 외로워지고, 날이 갈수록 몸은 쇠약해진다. 더 이상 기력이 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죽음에게 "이제 내려와."라고 얘기하고 끌어안는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은 다시 바꾸면, 내 삶을 더 연장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을 만나기 전, 다른 동물들이 사과를 따 가지 못하도록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닐까? 내 자식들이 결혼하는 것도 봐야 하고, 내가 열심히 모아 놓은 재산도 지켜야 하고, 내가 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다 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심.
욕심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어서 '분수'를 찾아보니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라는 뜻이 첫 번째로 나온다. <사과나무 위의 죽음>에서 여우 할아버지가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또한 순리를 거스르는 욕심일 뿐이다.
그럼 나는 지금 죽음을 생각할 때 기꺼이 손 잡을 수 있느냐. 그럴 순 없다.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순리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나 아직 보호자의 품 안에 있어야 할 두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성인다운 성인이 되도록 이 아이들을 잘 키우고 독립된 성인으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해 준 다음이라면, 그래 기꺼이 순리에 따르겠다. 이 의무감과 책임감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젊은 부모에게 있어, 예기치 못한 암 선고나 사고로 인한 아이의 죽음은 세상 어떤 죽음보다 더 슬프다. 그들이 더 살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욕심 때문이 아닐 것임을 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