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점심시간때 학교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뛰어놀던 시간을 제외하면 따로 운동을 할 시간이 없었다.
아니, 기회가 없었다. 제대로 운동을 배워본 적도 없었고,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었다.
갑작스레 시작하게 된 야구부 활동이 나에겐 너무나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매일 아침 유니폼과 장비들을 챙겨 등교를 하고, 수업이 끝나면 바로 학교 야구장으로 이동하여 운동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매일 1시간이 넘도록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각 포지션별 수비 연습과 배팅 연습을 하고,
매일 팀을 나눠 미니 게임을 하다보면 어느새 4~5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새벽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학교, 학원, 숙제를 반복하던 한국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우리 야구부 친구들만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농구부, 미식축구부, 마칭밴드부 등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이 제공되고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기별로 최소 1개 이상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선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장려가 되는 분위기였고, 오히려 공부만 하는 친구들은 'Dork, Nerd'라며 놀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던 매일매일 3~4시간씩 운동을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너무나 힘이 들었지만 또 동시에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공부를 하기 위하여 보낸 유학인데, 그곳에서 왜 야구를 하며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냐며 당장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 막상 시작하게 된 야구부 활동을 그만두기가 쉽지가 않았다.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한 야구부 활동, 친해진 동료들, 그리고 실력이 되지 않는 나를 야구부에 넣어주기 위해 노력해준 주장 친구와 코치 분들을 생각하니 바로 그만두겠다고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은 전화모뎀을 이용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한국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메일 체크도 매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느린 인터넷을 핑계로 며칠간의 시간을 벌어두었고 그사이 왜 야구부를 그만두지 못하는지 부모님께 말씀드릴 핑계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은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하였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학교 친구들에게 공부 할 시간이 빼앗기는 것 같아서 야구부를 그만둘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모든 친구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Are you a quitter, JB?"
충격이었다. 나에게 ‘포기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왜 공부 때문에 야구부를 그만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만약 야구부를 그만둔다면 나를 남자로, 심지어 친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한번 내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결정을 하였으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책임을 지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이었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임감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뒤돌아보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내 일을 스스로 책임지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학교라는 울타리가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집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고 부모님이 계셨다.
나는 학교에서 정해준 스케줄에 따라 공부를 하였을 뿐이고 학교 밖의 생활은 부모님께서 정해 주시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며 일을 추진해 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들이 사용할 용돈을 벌기 위해 레몬에이드와 쿠키를 만들어 팔고, 단순히 시간 채우기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진정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부하는 습관을 길러온 미국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계속해서 야구부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런데 왜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운동과 밴드부 활동 등에 시간을 투자할까 궁금해졌다.
학교 카운슬러(교내 학생 상담사)를 찾아가 이유를 물어보니 미국에서는 대학 입학시험인 SAT나 ACT만큼 중고등학교 시절 다양한 교외활동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SAT의 점수가 반영되는 만큼, 중고등학교 시절의 성적, 리더십, 봉사활동, 운동부 활동, 밴드활동 등 다양한 방면을 고루 검토하고 대학 입학 여부가 결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 주변에 조기유학을 하고 있는 지인도, 선배도 없었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유학을 시작하기 전, 공부만큼 운동도 많이 해야 한다고 유학원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학교 체육시간에 운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이야기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이메일에 적어 부모님께 보내드렸고, 다행히 부모님께서도 지속적으로 야구부에서 운동하는 것을 이해해 주셨다.
덕분에 3년간 학교 야구부에서 활동을 하며 State Semi-Final까지 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밴드부 활동을 통해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많은 행사에 초청을 받아 나중에는 TV(지역방송)에도 나오는 기회를 몇번이나 얻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는 Quitter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