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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r 04. 2024

동네에서 다운타운까지, 시카고와 작별 준비

10월 29일

본 글은 브런치북 <떠돌이 직장인의 시카고 한달살기>의 연장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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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온전히 보내는 마지막 하루.

한 달이란 시간은 참 애매하게 정드는 시간이구나. 하지만 서운하고 그리운 감정은 서울로 돌아가 천천히 보듬기로 하고, 마지막 날은 마냥 즐겁게만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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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으로 즐거워지려면 역시 밥을 먹어야지. 전날 핼러윈 바 투어의 여파로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평소 아침 6시면 눈을 뜨는 지독한 아침형 인간이기에 휴대폰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겨우 정신 차리고 친구는 학교 선배와 줌 미팅을 하고, 나는 그동안 아침 운동을 다녀왔다. 


정신이 또렷해지니 배고픔이 찾아왔다. 점심 메뉴는 일찌감치 정해뒀지. 동네에서 딤섬 맛집으로 소문났다는 'Koi Fine Asian Lounge'로 향했다. 



규모가 꽤 큰 중식당이었다. 점심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여유롭게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곤 메뉴판을 들여다보는데... 음료 빼고 음식만 서른 가지가 넘는다. 나는 모르겠으니 2주 전에 여기서 회식한 너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긴다, 친구야.


메뉴 다섯 개를 주문했더니 테이블이 꽉 찼다. 페이스트리처럼 바삭하고 쫄깃한 총좌빙, 샤오롱바오와 샤오마이, 연잎밥, 그리고 굴소스 청경채 볶음까지. 밀가루와 고기가 주(主)인 양식만 먹다 오랜만에 아시안 음식 먹으니까 너무 맛있네.



음식을 다 먹고 나니 서버 분이 후식으로 쿠키 접시를 내밀었다. 포춘쿠키 둘, 사브레 쿠키 둘.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밀가루 쿠키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포춘쿠키 속 메시지가 궁금해 반을 갈라봤다. 


"내일을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을 즐겨라. (Nevermind tomorrow.)"

"곧 지나치지 못할 제안을 받게 될 것이다. (You will soon come across an offer that you shouldn't pass up.)"

포춘쿠키니 나쁜 메시지가 들어있겠냐마는, 여행의 끝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아쉬움을 달래는 문장들이라 더 와닿았다. 



친구가 행사 때문에 학교에 몇 시간 다녀올 동안 나는 근처 카페에서 푸어오버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일기를 썼다. 이번 여행은 꽤 길었는데, 하루도 안 빼고 기록했다. 잘 쓴 글이라곤 말 못 해도 여행지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경험한 것들을 생동감 있게 담았다고 생각한다. 날짜를 쓰고 일정과 돈을 차례로 정리하다 보니 정말 곧 떠난다는 게 실감 났다. 내일 이 시간이면 난 비행기 안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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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이 지나 친구와 재회했다. 원래의 계획은 브루어리에 가는 거였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다운타운에 있는 저녁식사 장소로 여유롭게 이동하기로 했다. 


다운타운행 기차에서 문득 시카고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꽤 잘 되어 있단 생각을 했다. 미국은 차가 선택이 아닌 필수고, 땅이 넓은 만큼 도시 안에서 차 없이는 이동이 어렵다. 여행자들이 비싸도 우버나 리프트 같은 서비스를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시카고에선 걱정했던 것보다 교통비가 훨씬 덜 들었다. 'CTA(Chicago Transit Authority)'란 기관에서 대중교통 시스템을 운영하고, 'Ventra'란 서비스 하나로 모든 티켓을 살 수 있어서다. 게다가 애플워치와의 연동도 가능해서 휴대폰이나 지갑을 꺼내지 않고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혼자만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치안과 이동의 편리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카고는 그런 면에서 만족스러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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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이 지나 다운타운에 도착했는데, 비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산을 쓰려해도 바람에 푸드덕거려서 그냥 축축해지는 걸 택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던 '매그놀리아 베이커리'였다. 2017년, 첫 직장에 최종 합격하고 뉴욕에서 2주간 혼자 여행했다. 돈이 없을 때라 1일 1 식 하며 돌아다녔는데, 그 와중에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는 큰맘 먹고 찾아갔더랬다. 


시카고에서 재회한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매장은 크진 않지만, 시그니처 메뉴들은 다 있었다. 바나나푸딩의 비주얼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안 먹어본 걸 경험해보자 싶어 바닐라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여전히 달고 부드럽고 맛있구나...!


계획에 없던 애피타이저로 입맛이 확 돌았다. 오늘의 목적지이자 마지막 만찬을 즐길 식당은 'The Dearborn'이라는 미국식 레스토랑이다. 인테리어는 화려하고 분위기는 활기차보였다. 



우리는 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인기 메뉴인듯한 세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제일 먼저 이곳의 시그니처라는 부드러운 롤빵이 나왔다. 방금 구워 따끈한 데다, 같이 주는 허브 크림치즈도 정말 맛있었다. 다음으로는 부라타 치즈 샐러드를 먹었는데, 익숙한 맛이지만 빵과의 궁합이 엄청 좋았다. 마지막은 미국식 양념치킨이 장식했다. 역시 육질도 좋고 갓 튀겨져 맛있었는데, 치킨은 역시 한국이 최고다. 



내 옆엔 혼자 오신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양념치킨에 야채수프를 시켜 천천히 다 드셨다. 중절모를 옆에 살포시 벗어두고 온전히 음식에만 몰입한듯한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심지어 치킨 발골도 나보다 훨씬 깔끔하잖아...!


좋은 사람과 맛있는 걸 먹는 순간들은 매번 다른 감정으로 행복하다. 시카고의 시내 한복판에서, 꽤나 고급스러운 식당의 바 자리에 앉아, 절친과 목이 쉴 때까지 웃고 떠들며 여행의 마지막 날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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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장기 여행인데도 친구 덕에 우여곡절은 거의 없고, 그저 매 순간이 새롭고 즐거웠다. 관광 도시로 유명한 곳이 아님에도 나의 시카고 여행은 다양한 경험들로 가득했다. 반은 일하고, 반은 놀러 다닌 10월 한 달간 일과 쉼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도 진득하니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잔뜩 감상에 젖은 상태로 우버에 타 친구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컴컴한데도 창밖으로 지나는 거리와 가정집들에서 눈을 못 뗐다. 


정드는 건 아름답지만 슬픈 일이다. 특히 그 대상을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면 더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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