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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n 13. 2024

인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14시간 비행 일기

2024년 4월 30일

2년 만에 다니던 회사를 떠났다. 사연은 길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외국 회사 소속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경험해 본 귀한 시간이었다.


백수로 지낼 용기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이직처를 정하지 않고 퇴사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직 준비에 총력을 다했겠지만, 어쩌다 보니 유럽여행으로 회사 생활의 매듭을 짓게 됐다. 들뜨지만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

아무튼, 마지막 근무일 바로 다음날 나는 출국을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4호선 라인에 살면 좋은 점은, 인천공항 갈 때 직통열차를 탈 수 있다는 거다. 직통열차 표를 끊으면 서울역에 있는 도심공항터미널에서 미리 체크인도 하고 짐도 부칠 수 있다. 그렇게 서울역에서 인천공항 1 터미널까지 43분이 걸렸다.


환전하고 바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짐 검사와 자동출입국 심사는 15분도 안 걸렸다. 대한민국 만만세. 이번엔 면세 쇼핑을 따로 하지 않아, 게이트 근처에 있는 던킨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2년 전부터 비행 공포증이 생겨, 장기 비행을 앞두고는 신경이 예민해진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비행기를 아예 안 탈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다. 이제는 제발 극복하고 싶은데!


한 달 전, 서촌에 있는 한 책방에서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우연히 읽게 됐다. 목차 중에 '비행기 탑승 공포증'이 있었는데,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조언을 하더라.

1) 탑승 전 카페인은 되도록 섭취하지 마라.

2) 좌석을 지정할 땐 복도 쪽으로 하라.

3) 비행기는 사고 가능성이 가장 낮은 교통수단임을 팩트로 인지하라.


위 내용을 간단히 메모해 놓고 이번엔 실천해 보기로 했다. 공항에서 커피 마시는 게 낙이라 스몰 사이즈 라떼 한 잔을, 대신 디카페인으로 먹었다. 좌석은 오른쪽 복도로 지정했다. 그리고 계속 되뇌었다. 비행기가 난기류로 사고 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나는 괜찮을 거라고.


*

이번엔 아시아나를 택했는데, 오전 11시 5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11시 20분부터 보딩인데, 줄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느긋하게 30분쯤 타러 갔다. 장기 비행이니 기종은 A350-900으로 큰 비행기였고, 구조는 이코노미 기준 3-3-3이었다. 5월 초에 연휴가 많아서 그런지, 거의 만석이었다. 어매니티는 단출했다. 베개, 담요, 작은 파우치 하나가 전부였다. 파우치엔 슬리퍼와 일회용 양치 도구가 들어 있었다.


이륙하고 나서 한 시간쯤 지나 첫 식사가 나왔다. 불고기 쌈밥과 치킨 데리야키 중에 고르면 되는데, 아시아나는 뭐니뭐니해도 쌈밥이지. 역시나 무난하게 맛있었다. 달달짭짤한 불고기에 넉넉한 쌈 야채. 여기에 입가심으로 바람떡까지.


이번 비행에서의 밥 친구는 영화 <바비>였다. 기내 엔터테인먼트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작년부터는 영화 한 편씩 보는 게 또 소소한 재미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덜 화제가 된 것 같은데,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전 회사에서는 <바비>를 인생영화로 꼽는 동료들이 여럿이었다.


비현실적 설정인데 엄청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바비랜드를 탈출한 '돌연변이 바비(마고 로비)'의 시선으로 현실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당연했던 사회적 통념들이 사실은 얼마나 희한한 시스템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아주 재밌진 않았지만 장면에 따라 한없이 가벼워지기도, 꽤나 무거운 메시지를 품고 있기도 한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여섯 시간 후 두 번째 식사가 나왔다. 새우볶음밥과 고추장 로제 치킨 백반 중에 고르는 거였는데,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골랐다. 닭고기도 닭고긴데, 한국식 로제 소스는 못 참지. 불고기 쌈밥보다도 맛있게 먹었다. 매콤한 양념의 닭고기도 맛있었고, 샐러드부터 브라우니인 척하는 초코 파운드케이크도 괜찮았다.


밥을 먹고 나선 또 컴컴한 기내에서 몇 시간을 버텼다. 약기운에 잠이 온다는 센 멀미약도 먹고, 안대를 차고 가만히도 있어봤는데 역시나였다. 근데 신기하게도 별로 괴롭지 않았다. 난기류를 몇 번 만났지만 기내 방송이 나와도 식은땀은 안 났다! 지루했지만 무섭진 않았다.


나... 이렇게 비행공포증 극복하나...?

비행기보다 당장의 내 미래가 더 무섭다.


착륙을 한 시간 반 남기고 간식이 나왔다. 로제치킨 파니니였는데, 납작하게 누른 핫도그 빵이 부드러워서 괜찮았다. 그리고는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화면에선 앉아서 할 수 있는 스트레칭 영상이 나왔는데, 다들 몸이 찌뿌둥했던지 자리에서 열심히 따라 하는 게 귀여웠다.


*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은 한적했고, 표지판 안내가 잘 되어 있어 헤매지 않고 쭉 걸어가니 바로 입국심사하는 창구가 나왔다. 입국 심사는 너무나 간단했다. 미리 신청해야 하는 것도 없고, 아무 질문 없이 여권만 쓱 보고는 그냥 가란다. 이래도 돼? 감사합니다...


금세 짐 찾는 곳으로 넘어와 친구랑 접선했다. 포르투갈에서 넘어온 친구는 엄청 피곤해 보였다. 2시간의 비행 내내 앞자리 승객 여섯 명이 끊임없이 큰 소리로 대화했단다. 수다는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계속 됐다. 저녁 7시 반에도 바르셀로나는 한낮처럼 밝았다. 나 스페인에 온 거 맞네!


첫날은 공항 근처 이비스에서 묵기로 했다. 택시로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곳이었다. 트윈베드룸을 예약했는데, 생각보다 좁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환기할 수도 있고, 화장실도 나쁘지 않았다. 1박만 할 거니까 애매한 위생은 흐린 눈하자. 준수한 고시원 같은 느낌이지만 10만원대 초반으로 이 정도 컨디션이면 만족이지.


숙소 앞엔 대형 까르푸가 있었다. 저녁 8시에도 밖은 환했지만, 오랜 비행으로 너무 피곤했던지라 가볍게 저녁거리만 사 오기로 했다. 바르셀로나 오면 꼭 마셔봐야 한다는 클라라 레몬 맥주, 친구가 고른 립, 그리고 파인애플까지 숙소 테이블에 가볍게 차렸다. 반쯤 자고 있는 상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날이 깜깜해졌다.


*

일 걱정을 하면서도 막상 스페인에 오니 속절없이 행복이 밀려 들어온다니, 나도 참 속없다. 친구는 회사에서 장기근속 기념 휴가를 받았고, 나는 출장과 승진을 논의하다 퇴사를 택했다. 상반된 상황에 있지만서도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데에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이 여행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첫 페이지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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