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스페인에서의 첫 해가 떴다. 지독한 아침형 인간은 시차에도 구애받지 않지. 아니나 다를까 6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고, 아무래도 다시 자기엔 그른 것 같군.
자는 친구를 뒤로 하고 조심조심 준비해서 아침 산책을 나왔다. 그래도 통잠을 자고 일어나서 꽤나 개운했다. 해도 안 뜬 낯선 거리를 10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365 Cafe'라는 곳이었다. 6시부터 영업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원래는 커피 한 잔만 마시려고 했는데, 첫 손님인데 정 없게 그러면 안 되지 않나. 사실은 빵 굽는 냄새에 홀려 작은 크루아상을 두 개 샀다. 하나에 0.7유로이니 천 원 조금 넘는 셈이다. 유럽은 크루아상 종류가 참 싸다.
카푸치노를 홀짝이며 밝아지는 거리와 하나 둘 카페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구경했다. 작년 이맘때도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출장 중이라 자유시간은 거의 없었다. 빵은 사 먹어도 카페는 짬이 안 나 못 갔다. 올해도 출장 때문에 바르셀로나 구경은 못 하겠다 싶었는데, 엉겁결에 퇴사 여행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버렸네.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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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일어났다길래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숙소로 돌아갔다. 이 카페의 소박하고 여유로운 바이브가 좋아 친구를 데리고 다시 올 생각이었다. 아까는 가로등만 쫑쫑 켜져 있던 길이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 가로수처럼 자연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건물들도 한몫한다. 이 거리는 후자다. 알록달록 건물들, 참 마음에 드는구먼.
친구를 데리고 다시 온 카페는 진열대가 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꾹 참았다. 아무리 나라도 오전부터 밀가루 과다섭취는 좀 그래.
친구는 애플파이와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한입씩 먹어봤는데 무난하게 맛있었다. 동네에 이런 카페가 있다면 매일 와서 얼굴 도장을 찍을 텐데. 아침 6시부터 5천 원으로 커피에 빵 먹을 수 있는 곳, 어디 없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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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나(Girona)라는 도시를 아시나요? '헤로나'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친구의 제안으로 지로나에서 3박을 보내기로 했다. 가는 방법은, 바르셀로나 산츠(Sants) 역에서 렌페(renfe) 기차를 타고 지로나 역까지 가는 거다. 시간별로 티켓 가격은 다른데, 편도 기준 1~2만 원이다.
어제 묵은 숙소에서 산츠 역으로 갈 땐 시내 기차를 탔다. 타지에서 지상철을 타면 여행 온 실감이 난다. 그때의 기분은 날씨에 따라 다르다. 화창할 땐 설레고, 흐릴 땐 왠지 쓸쓸하다. 이번엔 눈이 부실만큼 하늘이 쨍했고,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산츠 역에서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겨 역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었다. 스페인엔 '메뉴 덱 디아(Menú del día)'라는 음식 문화가 있다. 애피타이저, 본식, 디저트가 하나의 코스로 묶여 있는 메뉴다. 마침 15유로에 샐러드, 라자냐, 푸딩을 먹을 수 있는 메뉴 델 디아가 있었다. 왠지 코스트코 푸드코트에서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비주얼에 맛도 그랬다.
바르셀로나에서 지로나로 가는 렌페는 KTX와 진짜 비슷했다. 창밖으론 멋진 풍경이 지나가는데 우리의 대화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퇴사 썰에서 시작한 수다는 커리어 고민으로 이어졌고, 어느새 눈으로 풍경을 담는 것보다 친구와의 대화에 더 몰입했다.
한동안 혼자 하는 여행이 제일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의 동행은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혼자만의 과거는 기억, 함께했던 과거는 추억이란 문장을 어디서 봤더라. 스페인에서의 추억은 한국에 돌아가면 고군분투하며 살 미래의 나에게 하나씩 기분 좋게 꺼내 먹을 수 있는 초콜릿 상자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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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았다. 역 근처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유럽의 조용한 소도시, 하면 생각나는 차분한 풍경이었다. 노동절이라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구시가지에 가까워질수록 초록이 시야에 가득했다. 10분 만에 우린 오랜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1박을 보낼 에어비앤비는 작은 성처럼 생긴 3층짜리 건물이었다. 돌벽에 철문, 그위로 드리워진 넝쿨 식물이 멋스러웠다. 은퇴 후 바르셀로나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다는 호스트는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12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집은 돌로 구조를 만들고 나무 가구와 소품으로 공간을 채웠다.
숙소에 대한 감탄은 잠시 접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첫날이니 구시가지를 가볍게 돌아보기로 했다. 지로나에선 높은 성벽을 따라 걷는 게 필수 코스란다. 성벽으로 가는 길에 난 이미 이 도시가 좋아졌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며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데도 마냥 좋았다. 대도시나 유명 관광지에서는 못 느낄 평온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성벽길을 걸으며 몇백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건물들을 실컷 봤다. 비현실적인 웅장함이라 증강현실 게임 속에 있는 듯했다. 그렇게 구시가지의 전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한 시간 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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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친구 한 명이 더 합류하기로 했다. 영국에 사는 친구인데, 스페인으로 오는 비행기는 연착되고 지로나로 오는 기차는 놓친 탓에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살짝 지친 우리 셋은 한 식당에서 만났다. 원래 가고 싶었던 곳들은 노동절이라 영업을 안 했다. 그냥 문이 열려 있단 이유로 들어간 식당은 동네 할아버지들의 사랑방인 듯했다. 가게 안엔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손님 한 팀이 전부였다.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맥주 세 잔에 안주 몇 가지를 주문했다.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걸 보니 냉동식품을 데워주나 보다. 오징어 튀김, 감자튀김, 크림 크로켓, 참치 샐러드는 괜찮은 조합이었다. 갓 튀겨서 그런지 따끈따끈하니 맛있었다. 나 정말 입맛 안 까다롭네.
그렇게 한 자리에서 세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우리들이 거의 15년이 지나 스페인의 한 식당에서 맥주잔을 부딪친다. 시간의 흐름을 실감할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서글프기도 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바람도 세고 비도 흩뿌리는 탓에 몸이 으슬으슬했는데, 마음은 훈훈한 불빛을 품고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