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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n 20. 2024

비 오는 지로나에서 먹고, 마시고, 걷기

2024년 5월 2일

눈 뜨자마자 태블릿을 챙겨 살금살금 1층 거실로 내려왔다. 온통 돌계단이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에어비앤비 주인분이 준비해 둔 곡물 바게트를 조금 잘라 치즈랑 버터를 발라 야금야금 먹었다. 전날 누텔라나 잼을 사뒀어야 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 멍하니 거실 곳곳의 소품을 바라보면서.


*

애초에 1박만 예약한 에어비앤비인지라, 짐을 챙겨 근처 락커에 맡겨놓기로 했다. 친구가 'Lock&Roll'이란 서비스를 찾았고, 덕분에 큰 캐리어 두 개와 배낭 하나를 종일 보관할 수 있었다.


일상에선 꽤나 계획형인 나는 여행만 오면 많은 걸 물 흐르듯 내버려 둔다. 시간으로나 비용으로나 효율에 대한 생각은 잘 안 하기에 엄청 헐렁헐렁하게 다니는데, 이번엔 친구가 꼼꼼하게 이것저것 챙겼다. (고맙다 친구야...!)


짐을 맡기고선 번화가에 있는 'Fedral Cafe'라는 브런치 전문점에서 또 다른 친구까지 셋이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을 줄 알았지.


2층 창가에 자리 잡고 지로나의 첫인상이 얼마나 좋은지에 이야기하다 보니 커피가 나왔다. 플랫화이트 두 잔과 롱블랙 한 잔. 커피 맛집은 아니었지만 여행 중에 마시는 모닝커피는 아무래도 좋다.


음식은 샥슈카, 햄치즈 크루아상,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했다. 이것도 아주 맛있진 않았지만 그냥 오랜 친구들과 브런치 먹는 이 시간이 좋았다. 우리보다 늦게 온 양옆 테이블 손님들이 다 떠나갈 때까지도 우리는 옛날 얘기를 하고 또 했다.


*

빵순이에게 스페인은 추로스의 나라다. 근처에 오후 1시 반까지만 하는 추로스 가게가 있길래 서둘러 찾아갔다. 'La Xurreria De La Cort Reial'이란 가게다. 할아버지 사장님께 손짓 발짓으로 추로스 두 개를 주문했다. 플레인 하나, 초코 하나. 플레인은 꽈배기처럼 쫀득한 식감이고, 초코는 코팅 때문인지 살짝 바삭했다. 튀긴 밀가루이니 어찌 맛이 없겠냐마는, 더 맛있는 곳을 찾아야겠어.


추로스를 들고 정처 없이 걷다가 지로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빨간 다리'를 만났다. 에펠탑을 만든 구스타브 에펠이 만든 다리라서 '에펠 다리'라고도 부른단다. 빨간 철제로 만든 격자무늬가 인상적이다.


다리를 건너 맞은편 거리에 가자마자 유명한 젤라또집, 'Rocambolesc Gelateria'를 발견했다. 에어비앤비 주인분에게 추천받은 곳이라 꼭 가보고 싶었는데, 운이 좋군. 베이스 아이스크림이 특이한 곳인데, 우리는 스모키한 향신료가 느껴지는 배맛 아이스크림에 마시멜로를 올렸다. 이렇게 다양한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 존재한다니!


밥도 먹었겠다, 군것질도 했겠다, 기분 좋게 골목을 따라 즐비한 가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Re-Read'라는 중고 책방을 발견했는데, 홍보 포스터 문구(Re-Reading is sexy)가 인상적이었다. 섹시 프레임을 중고 독서에 씌울 수 있다니... 업사이클링에 착함이 아닌 섹시함을 더하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

지로나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계속 대성당을 지나치게 된다. 마침 비도 주룩주룩 오겠다, 5유로씩 내고 안으로 들어가 봤다. 영어 오디오 가이드도 제공해 준다. 종교가 없는 사람에겐 유럽의 여러 성당이 비슷해 보인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신화나 교리의 이야기를 담은 조각들. 근데도 볼 때마다 웅장함에 놀란다.


성당에서 나와 반대편 골목의 가게들을 구경했다. 친구가 아침 산책길에 들렀다는 초콜릿 가게를 발견했다. 팔뚝만 한 초콜릿바가 시그니처인듯했다. 초콜릿 전문이지만, 누가나 캐러멜도 맛이 다양했다. 그 옆엔 그릇 가게가 있었는데, 전형적이지 않은 무늬와 색 조합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행 초반이라 운반에 조심해야 하는 주방용품은 살 수 없어 아쉬웠다.


많이 걸었으니 잠시 쉬어가자. 지로나의 많은 식당과 바는 오후 3시부터 7시 정도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다. 시에스타(낮잠) 때문인지, 저녁을 늦게 먹는 문화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가는 가게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다행히 오후 4시까지 영업한다는 크레페리, 'Creperie Bretonne'이란 가게를 찾아 냉큼 들어갔다. 가볍게 와인 한 잔씩 마시며 고생한 발에게 약간의 쉬는 시간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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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근처에 맡겨 놓은 짐을 찾아 'B&B Hotel Girona2'라는 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다. 2박을 책임질 이 숙소는 번화가에서는 좀 멀었는데, 시설은 깔끔하고 괜찮았다. 트윈베드룸은 딱 기본적인 크기와 구성의 방이었다. 캐리어를 펼쳐놓을 만큼의 공간도 있고, 창문을 열어 화기도 할 수 있고, 10만원대 초반에 이 정도면 만족이다!


짐을 풀어놓고 날이 갰길래 얼른 외출했다. 이 호텔 근처는 또 다른 분위기다. 그리드 형태로 반듯하게 만든듯한 도로는 온통 평지인 데다 쇼핑몰 외엔 높은 건물이 없어 뻥 뚫린 느낌이었다.


저녁도 근처에서 먹기로 했다. 'Saltapes Bar'라길래 평범한 타파스 바인 줄 알았다. 분명히 가볍게 먹기로 했는데... 직원분들은 영어를 못했고, 우리는 스페인어를 못했다. 파파고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주문했다. 가격도 저렴한 데다 타파스처럼 조금씩 나오는 메뉴인 줄 알고 네 개를 주문했는데, 옆 테이블을 끌어와 붙여야 할 정도로 큰 접시에 줄줄이 나왔다. 꼴뚜기 튀김, 새우구이, 치즈 샐러드, 토마토소스 올린 바게트까지.


어쨌든 우리가 주문한 거니까 다 먹어야지. 와인의 힘으로 차근차근 먹어보는데, 시시각각 가게의 분위기가 변했다. 밖에선 비가 퍼부었다가 그쳤고, 사장님은 스페인식 트로트(?)로 추정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춤을 추셨다. 혹시 실례일까 봐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또 먹다 보니 먹어지더라. 세 시간을 그렇게 머물다가 남은 건 포장해서 달랑달랑 들고 왔다. 즐거움으로 꽉 채운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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