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인 Jun 23. 2024

스페인에서 먹는 생애 첫 미슐랭 코스요리

2024년 5월 3일

출장일 줄 알았던 유럽행이 퇴사여행이 되고, 착잡한 마음으로 스페인에 도착했다. 근데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라 금세 즐거워졌고, 벌써부터 시간이 가는 게 아까울 지경이 됐다. 


동시에, 퇴사여행이니만큼 나를 위한 보상 한두 개 정도는 있어도 된다 싶었다. (간사하다 간사해...) 물질적인 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먹는 경험에 잔뜩 투자하기로 했다. 평소의 여행에서는 엄두를 못 내던 그런 것들. 


좋은 핑계도 있겠다, 이번 여행에서야말로 파인다이닝에 도전해 볼 기회다! 유럽에서 한 번쯤은 미슐랭 레스토랑을 가보고 싶었다. 바르셀로나는 또 가격대가 높은 것 같아, 근교 도시인 지로나에서 도전해 봤다. 


*

마사나(Massana)는 지로나 올드타운 근처에 있는 미슐랭 1 스타 레스토랑이다. 유럽 음식을 퓨전 스타일로 만드는 곳인데, 1985년에 문을 열고 2007년에 미슐랭 1 스타를 받았다. 영업시간은 오후 1시부터 2시 30분까지, 그리고 오후 8시부터 9시 30분까지로, 하루에 세 시간밖에 운영을 안 한다. 


홈페이지에서 미리 예약을 해놓고, 당일엔 1시 땡 하고 들어갔다. 널찍한 공간을 따뜻하게 감싸는 조명, 모던한 인테리어, 감각적인 소품 등이 눈에 들어왔다. 단체 손님을 위한 프라이빗한 공간도 있는데, 우리는 홀에 있는 둥근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냅킨을 무릎에 내려놓고 메뉴판을 펼쳤다. 사실 홈페이지에서 이미 메뉴를 외울 만큼 들여다봤지만, 메뉴판을 흥미롭게 정독하는 척했다. 애피타이저와 본 메뉴 두 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단품으로도 먹을 수 있지만 이곳의 시그니처는 15가지가 넘는 메뉴를 조금씩 먹어보는 코스요리다. 가격은 1인당 155유로고, 와인 페어링까지 더하면 235유로다. 155유로만 해도 한화로 22만원이니, 와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

✔️ Mint Consomme

✔️ Mussels

✔️ Salmon Royal

✔️ Waldorf Macaron

✔️ Gillardeau Oyster 


처음엔 애피타이저 5가지가 한 번에 나왔다. 민트향이 나는 장국을 호로록 마신 다음, 라임과 고수 소스에 절인 홍합을 먹고, 폰즈 소스로 맛을 낸 연어와 캐비어 젤리를 먹고, 셀러리와 호두가 들어간 마카롱으로 살짝 입가심을 한 다음, 레몬즙을 뿌린 생굴로 마무리했다. 


일본식 양념으로 간을 한 해산물 위주였다. 날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홍합이 제일 입에 맞았다. 상큼하면서도 식감은 쫄깃한 게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지. 


✔️ Quail rillete and cereal crust

✔️ Egg mollet and salmorejo

✔️ Lacquered thigh


본식은 메추리 요리 세 가지로 시작했다. 콩피(confit)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다는 리예뜨(Rillettes)는 곡물 시리얼로 만든 크래커에 올려 먹고, 메추리 알과 메추리 육포가 들어간 맑은 장국을 마신 다음, 팔각 등의 향신료 맛이 느껴지는 메추리 허벅지살로 마무리. 


빠떼나 콩피의 몽글몽글한 식감은 적응이 안 된다. 그런데도 바삭한 크래커와 먹으니 조합이 좋았다. 한입 크기의 쫄깃한 허벅지살이 제일 맛있긴 했다. 


✔️ Foie Gras


다음은 푸아그라. 디저트처럼 예쁜 플레이팅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옥수수튀김과 식용 꽃을 올린 비스킷 옆에 초콜릿 모양의 네모 반듯한 푸아그라. 식감은 엄청 부드럽고, 맛은 고소한데 살짝 단짠이 느껴졌다. 푸아그라를 잘 못 먹는 사람에게도 괜찮은 모양과 맛이었다. 미식은 눈으로 시작해서 입까지 오감을 충만하게 만드는구나!


✔️ Home made Stewed Meat Terrine


메뉴 이름은 테린느인데 종합선물세트 같은 요리였다. 다양한 고기를 야채 피클과 조금씩 곁들여 먹으면 된다. 기름진 부위들이라 손톱만큼 먹는데도 풍미가 엄청났다. 마음속으론 피클 리필을 계속 외쳤다. 


✔️ Hake Kokotxa


콩으로 만든 크림소스를 얹은 대구 요리가 나왔다. 마늘 소스에 절인 캐비어가 토핑으로 올라갔다. 생선은 엄청 부드럽고, 소스는 진득하고 고소했다. 


이때가 벌써 2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는데, 친구들과 눈을 마주치고 애써 웃음을 참았다. 느릿느릿 먹는 코스요리에 살짝 나른해졌지만, 진지한 맛 평가는 포기 못하는 삼인조. 


✔️ Galician Beef Cannellonni


소고기 타르타르에 네 가지 머스터드소스가 나왔다. 앞서 먹은 테린느와는 또 다른 게, 지방이 훨씬 적은 부위였다. 머스터드소스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하군. 


✔️ Sea and Mountain


메뉴 이름이 '바다와 산'인 이유가 있다. 구운 오징어와 미트볼을 조금씩 잘라 감자 무스와 먹으면 된다. 대체 스페인에서는 오징어랑 문어를 어떻게 요리하길래 이렇게 부드러운 걸까? 아니면 애초에 종이 다른 걸까?


✔️ Tribute to Massana's Duck Margret


이곳의 대표 메뉴라는 오리구이가 나왔다. 차돌박이처럼 엄청 얇고 기름졌다. 여기에 동글동글한 배 조각을 둘둘 말아먹으면 되는데, 차돌박이에 쌈무 먹는 것처럼 잘 어울렸다. 배는 귀엽게 세 알이 나오는데, 안 귀여워도 되니 왕창 주시면 안 되나요. 


✔️ Oxtail


본식 마지막 요리는 소꼬리찜이다. 양파와 블랙 올리브로 만든 소스에 야들야들한 소꼬리를 푹 담가먹으면 된다. 아는 맛인데 그래서 더 반갑고 맛있었다. 장조림 같기도, 갈비찜 같기도 한 이 요리, 매력 있네. 공깃밥 주세요...


✔️ Reinete Apple


길고 긴 메인 요리가 지나고, 디저트가 나왔다. 사과를 테마로 한 디저트인데, 아삭한 조림부터 사르르 녹는 샤벳까지 한입한입이 행복했다. 가운데에 있는 진짜 사과 같은 동그라미는 초콜릿 코팅된 바닐라 무스였다. 


✔️ Chocolate Bean to Bar


두 번째 디저트는 초콜릿 종합세트다. 초콜릿을 당도별, 식감별로 다양하게 맛볼 수 있었다. 차가운 무스 떠먹었다가, 단단한 초콜릿 깨 먹었다가, 맛만큼이나 재미도 있는 디저트였다. 


✔️ Chocolate and Passion Fruit Bonbon


진짜 마지막으로 나온 디저트. 디카페인 커피에 초콜릿과 패션후르츠맛 봉봉을 하나씩 먹으면 된다. 입에서 스르륵 녹는 식감에 달달하고 상큼한 맛이 교차되는 게 입가심으로 좋았다. 


*

길고 긴 코스요리가 끝났고, 시계를 보니 4시였다.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세 시간을 먹기만 했다. 처음엔 마냥 설렜다가, 중간엔 배불러서 살짝 지쳤다가, 마지막엔 베실베실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에서 만나 급식실에 마주 앉아 있는 게 일상이었던 우리가 십몇년이 지나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다니,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여기서 또 십 년이 지나면 우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전 03화 비 오는 지로나에서 먹고, 마시고, 걷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