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런던은 쉴 새 없이 나를 매혹하고 자극하고 내게 극을 보여주고 이야기와 시를 들려준다. 두 다리로 부지런히 거리를 누비는 수고만 감내하면 아무것도 걸리적거릴 것 없다. 혼자 런던을 걷는 시간이 내게는 가장 큰 휴식이다."
권위에 쉽게 흔들리는 나란 사람. 어쩐지 런던을 두 발로 마구 누비고 싶어졌다. 비도 안 온다는데 긴 산책이나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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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걸어야 하니 일단 아침부터 든든히 먹어야지. 마트에서 사 온 빵 두 개를 데워 소이밀크랑 맛있게 먹고, 쿠키도우 맛 단백질 바로 야무지게 마무리했다.
친구는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라 혼자서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런던행 기차는 사람으로 빼곡했다. 40분을 달려 런던 유스턴(Euston) 역에 도착했더니 놀랍지도 않게 먹구름이 가득이다. 정말 비'만' 안 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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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코스는 그린 파크(Green Park)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 하이드 파크와 함께 런던 3대 공원이라 불리는 곳. 런던은 웅장하면서도 오래된 건축물 때문에 회색 도시처럼 보일 수 있는데, 커다란 공원들이 엄청난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렇다 할 특징이 있다기보단 널찍한 녹지와 커다란 나무들이 빼곡해서 산책하기에 딱이다.
그린 파크를 거닐다 보면 사람들이 유난히 한 곳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데, 바로 근위병 교대식으로 유명한 버킹엄 궁전이다. 10년 전 유럽에 처음 왔을 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근위병 교대식을 직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빨간 제복에 검정 털모자까지 쓰고 절도 있게 걸어가는 행렬이 참 인상적이었다.
또 한참을 걸었더니 세인트 제임스 공원이 나왔다. 그린 파크보다 알록달록한 느낌이다. 계절에 맞게 핀 꽃들과 온갖 소동물들이 돌아다니는 풍경이 평화롭다. 사람들이 코앞에 잔뜩 모여 있는데도 동물들은 신경도 안 쓴다. 어린이들이 불쑥 손을 내밀어도 심드렁한 모습이다. 나 대도시에 있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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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의 힘을 좀 빌려보자. 가까운 곳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여행에 오면 스타벅스를 꼭 한 번은 오고 싶다. 나라마다 다른 신메뉴 먹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영국 스타벅스는 이번 시즌에 '클로티드 크림 콜드브루'를 내놓았다. 스콘에 발라먹는 그 하얀 크림, 클로티드 크림을 커피에 올렸다고? 궁금하니까 그거 한 잔 주세요.
앗... 맛없다!
콜드브루 시리즈는 역시 바닐라 크림 콜드브루가 제일 맛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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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웨스트민스터. '영국 스러운' 건축물 하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반듯하고 뾰족한 스타일. 애초에 건물 색의 채도가 낮아서인지 낡은 외관도 초라하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걷는 게 좋아>라는 에세이 집에 이렇게 썼다.
"웨스트민스터는 드넓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좁고 뾰족하고 낡았으며 쉼 없이 활기차게 들썩거린다. 서민들의 북새통, 왁자지껄 평범한 거리에서 빠져나와 가장 고명한 남녀 인사로 엄선된 단체의 근사한 집회에 발을 들인 기분이다."
지금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리지만, 과거의 웨스트민스터는 도도하면서도 현지인들의 활기로 가득한 공간이었나 보다. 안까지 구경할 마음은 안 들어 기념품 샵만 빠르게 둘러보고 걸음을 옮겼다.
강 쪽으로 걷는데 수리를 끝내 위풍당당해진 빅벤이 보였다. 2017년부터 시게탑 리모델링을 시작했는데, 1280억 원(!)을 들여 2022년에 끝냈단다. 시계 주변으로 반짝반짝한 장식이 붙어 있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템스 강에 대해서는 뭐라고 썼더라.
"홀가분하고 상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강이 있지. 이를테면 런던브리지의 템스 강변."
흐린 날씨 때문인지 상쾌하진 않았다. 그래도 천천히 돌아가는 런던아이까지 보고 나니 런던에 제대로 발을 붙였다는 느낌이 든다. 차갑지만 이상하게 정이 가는 도시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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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구경도 좀 해볼까. 런던이니까 뭐니 뭐니 해도 서점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워터스톤즈'는 영국의 교보문고 같은 서점 체인이다. 지점마다 인테리어도, 큐레이션도 조금씩 다르다. 관광객에겐 그저 생소한 베스트셀러와 신작 코너를 훑고, 표지만 봐도 짜릿한 해리포터 존으로 넘어갔다. 일러스트가 빼곡히 들어가 있는 양장본, 너무 탐난다...
문구류와 기념품까지 야무지게 구경하고 2층에 있는 카페에서 가볍게 샐러드랩을 먹었다. 팔라펠이 들어간 베지(veggie) 랩은 예상했지만 부실했다.
마지막으론 서점 맞은편에 있는 트라팔가 광장을 돌아봤다. 분수대와 그 주위의 사자상 네 마리를 한참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친구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한산했다. 창밖으로 말들이, 양 떼가, 광활한 언덕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눈으로 좇으며 머리로는 즐거웠던 런던 산책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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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 이유는, 친구가 저녁으로 브리치즈 파스타를 해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든 여행에서든 음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루...
친구는 루꼴라, 바질, 순무, 토마토 등을 잔뜩 넣고 브리치즈 조각들을 숭덩숭덩 썰었다. 갓 삶아 뜨거운 파스타면을 넣고 소금, 후추, 올리브유로 가볍게 간을 하면 끝!
재료는 풍성하고 맛은 엄청 녹진하고 고소했다. 하루의 피로가 파스타 한 그릇에 녹아버렸다. 자두랑 포도까지 먹고 기분 좋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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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만큼이나 운동하는 것도 좋아한다. 할 줄 아는 스포츠는 딱히 없지만, 땀이 주룩주룩 날 때까지 뛰거나 사이클을 종종 탄다. 그래서 헬스장에 가겠다는 친구에게 나도 데려가라며 따라붙었다.
친구가 진득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온갖 유산소 기구를 돌아가며 체험해 봤다. 한국 헬스장과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여행 중이라는 생각에 힘이 마구 솟았다. 그렇게 먹은 만큼 운동한 하루로 뿌듯하게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