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여행을 시작한 지는 2주, 남은 건 1주 되는 시점이다. 아쉬워할 시간에 뭐 하나라도 더 하자는 생각에, 14일 차는 문화생활로 충만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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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엔 전시를 관람해 볼까. 런던엔 많고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는데, 그중 '웰컴 컬렉션(Wellcome Collection)'이라는 인간의 신체 기관과 건강을 주제로 운영되는 박물관이자 도서관을 방문했다. 시즌별로 업데이트되는 무료 전시를 볼 수 있어 여행객이 부담 없이 방문하기에 좋다. 작년 이맘땐 '우유'가 주제였는데, 우유의 역사와 우유 소비에 관련된 논쟁거리들을 다루는 전시였다. 그 기억이 좋아 1년 만에 다시 찾았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Jason and the Adventure of 254'다. Jason Wilsher-Mills라는 작가의 컬렉션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인상적이었다.
전시관은 따로 나뉘지 않고 원하는 순서로 작품을 자유롭게 관람하면 된다. 중앙엔 커다란 조형물이 있다. 침대에 한 소년이 누워 있는 모습인데, 작가는 관객들이 전시 시작부터 이에 압도되어 몰입감을 느끼길 바랐다.
Jason은 11살에 면역체계에 문제가 생겨 전신마비로 병원 침대에서 5년을 보냈다. 치료는커녕 생존도 불투명했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작가는 이 시기의 기억을 캔버스와 조형물에 담았다. 갑작스러운 장애에 대한 좌절과 우울, 어린 소년 다운 만사에 대한 호기심, 가족과의 유대감, 그리고 마음속에서 예술성이 깨어나는 느낌들이 작품에 뒤엉켜있다. 선들은 울퉁불퉁한 곡선이고, 색채는 엄청 비비드하다.
TV에서 올림픽 경기를 보고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병원에서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등 장애에 굴복하지 않았던 소년의 삶을 엿본 것 같아 마음이 뒤숭숭했다. 마음속의 어둠을 예술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은 부럽고 존경스럽다!
전시를 보고 나선 기념품 숍을 가볍게 둘러봤다. 박물관의 컨셉에 맞게 장기(!)나 해골(!) 관련 굿즈가 많다. 엽서를 한 묶음 사려다가, 받는 사람이 기함할 것 같아 그냥 눈으로만 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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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진 않지만 간식으로 체력을 끌어올려보자. 런던을 걷다 보면 하루에도 다섯 번씩 보는 프레타 망제(Pret A Manger)에 갔다. 샌드위치, 샐러드, 요거트볼 등 가볍게 먹기 좋은 것들이 가득하다. 가격도 맛도 평범하지만 여행자에겐 그 평범함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4파운드를 내고 아사이볼을 먹었다. 기대 안 했는데 구성이 꽤나 괜찮았다. 과일과 그래놀라 위에 꾸덕한 아몬드 버터, 거기에 상큼한 아사이 스무디가 가득이라니 맛없기 힘든 조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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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시간 정도 산책을 즐기다 퇴근한 친구와 펍에서 만났다. 유명한 곳은 너무 붐빌 것 같아 적당히 한적해 보이는 곳을 골랐다. 'The Royal George'라는 곳인데, 로열보단 캐주얼한 분위기의 로컬 펍이었다.
1층은 일 끝나고 온 사람들이 가볍게 술 마시는 분위기였다. 지하도 있길래 내려가봤더니 하모니카 동호회가 단체 레슨을 받고 있었다. 선율은 활기찬데 왜 표정들이 다 침울한 거죠...!
혼란은 지하에서 끝나지 않았으니, 자리에서 큐알코드로 주문을 했는데 30분이 지나도 음식이 안 나오는 거다. 분명 결제까지 했는데 이상하다 싶어 직원분에게 확인하니 큐알코드가 다른 지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 덕분에 다른 지점에 있는 손님들이 배불리 먹겠구나...
직원분이 미안해하며 우리의 주문 내역을 사진으로 찍어갔다. 10분 정도 더 기다리니 맥주 두 잔과 튀김 요리가 나왔다. 시즈닝을 듬뿍 뿌린 옥수수는 입에 착착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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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에서의 맥주 한 잔은 저녁에 볼 뮤지컬을 더 재밌게 보기 위함이었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작품은 어렸을 때부터 닳도록 본 영화 중 하나인 <시스터액트>였다. 친구에게 지나가듯 뮤지컬 보고 싶단 얘기를 했는데, 그날 저녁에 갑자기 표를 알아봐 줬다. 마침 스프링 세일이 한창이라 4만 원대에 두 장의 표를 구했다!
공연 장소는 '도미니언 극장(Dominion Theatre)'이라는 거의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가장 저렴한 티켓으로 예매한지라 좀 걱정했는데, 시야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러닝타임은 인터미션까지 포함해서 2시간 40분 정도였는데, 1부 중간부터는 계속 눈물을 훔쳤다. 영화와 겹치는 넘버가 하나도 없는데 그냥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벅찼다. 배우들의 노래 실력도 출중해서 친구랑 계속 소름 돋는다며 팔을 쓰다듬었다.
작년에 왔을 땐 다른 극장에서 <마틸다>를 봤는데, 그때도 좋았지만 이번엔 더 감동적이었다. 친구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선 어떤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고, 어떤 노래가 제일 좋았는지 끊임없이 토론했다. 오감이 즐거웠던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