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전날은 내내 친구집에만 있었으니, 다시 힘내서 시내에 나가기로 했다. 친구네 동네인 '블레츨리(Bletchely)'에서 런던 시내로 가려면 40분 정도 걸리는 기차를 타야 한다. 여느 근교 도시가 그렇듯, 블레츨리에서 런던으로 통하는 출퇴근 시간대의 기차는 엄청나게 붐빈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도, 현지 직장인들을 위해서도 그 시간대는 피하는 게 좋다. 별생각 없이 친구집을 나섰다가 기차역 대신 동네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아침이나 먹고 가자!
아침 7시에 여는 'Bletchely Bakery & Cafe'는 빵과 커피 냄새로 가득했다. 플랫화이트에 화이트초코 프레즐을 주문했다. 손바닥보다 큰 프레즐엔 단단한 초코 필링이 옹골차게 들어 있었다. 크림치즈 프레즐은 먹어봤어도 초코 프레즐은 처음이라 먹는 내내 감탄했다. 이 얘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자기는 예전에 달아서 다 못 먹고 싸왔다고 한다. 초코가 달아야 맛있지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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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카페에 있다가 오전 11시 기차를 탔다. 텅텅 빈 좌석에 골라 앉을 수 있어 짜릿했다. 무려 4인용 테이블석을 독차지했다지...
첫 행선지는 사흘 전에도 왔던 영국의 교보문고, 워터스톤즈. 이번엔 고워스트릿(Gower Street)에 있는 지점이었고, 음반 코너가 특화되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워터스톤즈도 그렇고, 포일즈(Foyles), 해처드(Hatchards) 등의 대형 서점들이 지점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지하로 내려가니 미술 코너도 엄청 잘 되어 있었다. 음악에, 미술에, 방대한 양의 문학까지. 이 지점은 예술에 특화된 곳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들춰보지도 않을 책들인데 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서점은 서점만의 온건한 공기 흐름이 있다. 모르는 언어로 쓰인 책들도 그냥 들여다보고 있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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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출한데 거한 식사를 하긴 싫고, 근처에 베이커리 카페가 있길래 그리로 향했다. 게일 베이커리(Gail's Bakery)는 살짝 고급스러운 느낌의 베이커리 카페 체인이다. 투썸플레이스와 파리크라상의 중간 정도랄까. 노릇노릇한 빵이 가득한 진열장을 한참을 쳐다보다, 버섯과 양파로 속을 채운 파이를 하나 주문했다.
맛있게 생겨놓고 맛이... 없네...
입에 들어가는 양식이 별로면 마음의 양식으로 위로받자. 아침부터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었다. 마침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 버전도 있었다. 통창 앞에 앉아 반쯤 끝낸 파이를 옆으로 밀어 두고 느긋하게 책이나 읽었다.
<다정한 매일매일>엔 책과 빵에 엮인 작가의 일상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취향이나 생각들이 나와 너무 비슷해서 살짝 소름 돋았다. 게다가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들이 작가님의 현실이라 참 부러웠다!
아무튼, 책 속엔 런던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나는 걷고 싶었다. 런던 시내를. 영국 박물관이나 빅벤, 런던 브리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곳이 버지니아 울프나 도리스 레싱, 캐서린 매스필드가 걸었을 거리라는 걸 떠올리면 평범한 골목마저도 특별해 보였으니까.
역시 런던은 걷는 걸 좋아하면 천국인 도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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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사랑단이라면 또 '호텔 쇼콜라(Hotel Chocolat)'를 지나칠 수 없다. 영국의 프리미엄 초콜릿 전문점이다. 가격은 부담스럽지만, 좋은 재료로 만든 초콜릿은 다 그렇기에 조금만 사볼 요량으로 방문해 봤다.
직원분이 새로 나온 맛의 핫초코를 먹어보라 건넸다. 캐러멜라이즈드 파인애플이 들어갔다더니 진짜 상큼함이 살짝 느껴진다. 초코는 진한데 텁텁하지 않다. 한 박스만 주세요... 초코볼, 초코비스킷, 초코바 등 재료도 모양도 다양한 초콜릿들이 박스 포장되어 예쁘게 진열되어 있다. 서너 개씩 묶음으로 할인도 해준다. 어쩔 수 없네, 이것도 네 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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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엔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고 막 돌아다녔다. 작은 가게들이 즐비해있다 싶으면 그 골목을 쭉 걸었다. 그러다 'Present & Correct'라는 문구 전문 소품샵을 발견했다. 필기구, 다이어리, 포스트잇 등 문구덕후들은 열광할 만한 아이템들이 한가득이었다. 영국은 물론 북유럽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물건들까지. 디자인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이었다.
도보 5분 거리에 'Hello Love'라는 또 다른 소품샵이 있었다. 앞서 구경한 곳보다 훨씬 키치한 느낌이었다. 온갖 색채를 가둬놓은 것 같은 공간에 용도 모를 소품이 가득했다. 맥시멀리스트라면 더 재밌게 구경했을 공간. 업사이클링으로 만든 액세서리도 많고, 판매액의 일부는 지역 사회에 소속된 예술가 단체에 기부한다고. 안쪽엔 작은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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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엔 크고 작은 공원이 수도 없이 많지만, '블룸즈버리 스퀘어(Bloomsbury Square)'는 가장 평범한 곳 중 하나이지 않을까. 커다란 나무들과 그 아래의 잔디밭이 전부다. 그에 맞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벤치에 냅다 널브러져 30분을 보냈다.
얼마 걷지 않고 또 공원을 만났다. '러셀 스퀘어(Russell Square)'는 상대적으로 훨씬 넓었다. 여러 가지 꽃들 덕분에 초록 외의 색들로도 알록달록했다. 거기에 청설모인지 다람쥐인지 모를 생명체들이 눈앞을 왔다 갔다 했다. 동물도, 사람도, 식물(?)도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많은 것들이 일시정지되는 것 같은 기분, 도시 안에 공원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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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친구집으로 돌아가는 길, 퇴근 시간을 피한다고 피했는데 기차는 만원이었다. 창문 앞에 바짝 서서 주택가를, 양떼 목장을, 사람이 살까 싶은 드넓은 들판을 구경했다. 희고 포동한 돼지들이 모여 있는 목장도 본 것 같은데, 너무 빠르게 지나쳐서 양을 돼지로 착각한 건지 잘 모르겠다. 돼지도 그렇게 방목해서 키우나...?
저녁엔 마트에서 사 온 진토닉을 홀짝이며 넷플릭스로 스탠드업 코미디쇼를 봤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TV에서든 유튜브에서든 잘 안 본다. 근데 테일러 톰린슨(Talyor Tomlinson), 트레버 노아(Trevor Noah), 마이클 매킨타이어(Michael Mcintyre)의 클립들을 차례로 보다 은근 빠져들었다. 남을 비하하지 않고 큰 무대에서 대중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