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하나는 애프터눈티요 하나는 피쉬앤칩스라 대답하겠다. 금요일을 핑계로 친구를 꼬셔 점심과 저녁을 든든히 먹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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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눈티(Afternoon Tea)가 테이블을 가득 채운 화려한 이미지라면, 그걸 간소화한 게 크림티(Cream Tea)다. 따뜻한 차와 스콘, 여기에 발라 먹을 크림과 잼만 있으면 크림티가 되기에 집집마다 저마다의 스타일로 즐긴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집에서 크림티 먹는 게 소원이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친구가 들어줬다! 막스앤스펜서에서 장본 걸로 이것저것 차리더니 완벽하게 구현해 줬다.
[구성 1: 홍차, 우유]
크림'티'니까 당연히 차부터 우려야 한다. 티틀리(Tetley)는 영국의 대표 차 브래드 중 하나인데, 마트에서 티백을 대량으로 살 수 있다. 디카페인 홍차로 준비 완료.
이전 회사 동료들도 그랬고, 친구도 그렇고 영국 사람들은 우유 없이 차를 잘 안 마신다. 밀크티처럼 우유에 우리는 게 아니고, 물에 우린 티에 간을 하듯 우유를 조금 붓는다. 커피로 말하자면 라떼가 아닌 화이트 아메리카노처럼!
[구성 2: 스콘, 클로티드크림, 잼]
제일 먹고 싶었던 버터스콘. 막스앤스펜서에서 산 플레인스콘의 설명란에는 '버터밀크와 클로티드크림을 듬뿍 넣어 만들었으니 잼만 곁들이세요'라고 쓰여있었다. 어림도 없지. 클로티드크림도 따로 샀다.
에어프라이어로 살짝 데운 버터스콘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데다 버터향이 엄청 진했다. 여기에 클로티 크림과 과일잼을 듬뿍 발랐다. 크림치즈와 버터의 중간 정도 되는 클로티드크림은 농축된 우유 그 자체다. 고소하고 또 고소하다.
영국에도 탕수육 '부먹' 논쟁과 비슷한 게 있다는데, 그건 스콘을 먹을 때 클로티드크림을 먼저 바르냐 잼을 먼저 바르냐란다. 아니 식감에도 영향이 없을 것 같은데 뭘 먼저 바르든 큰 차이가 있나...?
[구성 3: 샌드위치]
스콘만 먹으면 너무 간식 같으니 샌드위치도 만들었다. 친구는 음식을 하나만 하는 법이 없다. 당근 라페와 치킨 햄을 넣은 샌드위치 하나, 연어에 그릭 요거트를 바른 샌드위치 하나.
재료는 풍성한데 담백한 맛이라 술술 들어갔다. 스콘 먹다가 샌드위치 먹으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스콘을 먹을 수 있다.
후식으로는 비스킷과 쿠키들. 차는 그대로 두고 티푸드만 계속 바꿨다. 과자도 한 종류만 먹지 않는, 먹는 데에 진심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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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 프라이데이(Fish Friday)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영국에선 금요일 저녁에 피쉬앤칩스를 자주 먹는다고 한다. 마침 또 금요일이네! 이왕이면 펍 감성으로 맥주랑 같이 먹어보자 싶어, 퇴근하고 드럼 레슨을 받으러 간 친구를 기다렸다가 근처에서 회동했다.
'Captain Ridley's Shooting Party'라는 꽤나 화려한 이름의 펍은 '웨더스푼(Wetherspoon)'이란 그룹에 속해 있다. 웨더스푼은 영국과 아일랜드에 수많은 펍을 갖고 있는데, 웬만하면 기본은 한다고.
큰 벽돌 건물이라 외관에서부터 짐작은 했지만, 규모가 엄청 컸다. 입구 쪽은 바 테이블에 앉아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게임 기계로 노는 사람들이 많았다. 안쪽은 삼삼오오 모여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펍에서는 또 드래프트 라인업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맥주 종류가 꽤 많은데, 하프파인트 기준으로 5천원 미만에 마실 수 있다. 확실히 생맥주는 영국이 훨씬 싸다.
그나저나 펍의 바 테이블 보면서 넷플릭스의 <베이비 레인디어> 생각이 났다. 물론 그 펍은 캠든에 있고, 어둡고, 훨씬 작다. 여긴 큐알코드로 주문할 수 있어 바텐더가 손님과 진득한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주인공 도니가 이런 펍에서 일했다면 어떨까.
우리는 둥근 테이블에 자리 잡고 나는 맥주를, 친구는 사이더(Cider)를 마셨다. 영국의 바나 펍에는 맥주만큼이나 사이더 종류가 많다. 과일식초와 일반 사이다를 섞은 듯한 이 알콜 음료는 여름에 마시기에 좋다고.
[안주 1: 피쉬앤칩스]
이거 먹으러 펍 왔지. 두 가지 사이즈가 있길래 작은 걸로 주문했다. 맥주 한 잔 포함해서 10파운드가 좀 안 되었으니, 가격도 괜찮다. 튀긴 대구, 감자튀김, 찐 완두콩이 전부다. 타르타르소스든 마요네즈든 원하는 소스를 셀프바에서 가져다 먹으면 된다.
양은 적지만 실했다. 갓 튀긴 생선에 타르타르소스 발라먹는 맛은 실패가 없지.
[안주 2: 할루미 프라이]
이번 여행에선 매일 다른 종류의 치즈에 도전하고 있다. 펍에서 메뉴를 훑어보는데 할루미 치즈를 스틱형으로 튀긴 게 눈에 들어왔다. 소스로는 치폴레 마요를 골라 주문했다.
쿰쿰한 향은 전혀 없는 깔끔한 치즈. 모짜렐라랑 비슷한데 조금 더 탄력 있다. 식감에 호불호는 있겠지만 나는 완전 호! 기름기도 적어 손으로 집어 먹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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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많고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인연에 대해서다. '시절 인연'을 받아들이고 나니 가족이든 친구든 관계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고. 가까워짐과 멀어짐을 반복하다 결국 주변에 남는 사람들이 내 인연이지 않겠냐며.
사실 이렇게 생각한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편안하면서도 외로운 순간들이 분명 있다. 그래도 멀어짐에 대한 서운함보단, 가까워짐에 대한 반가움을 더 인식하게 된 것 같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