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전날 새벽 한 시 넘어서 잔 탓인지, 너무 많이 걸어 다닌 탓인지 여덟 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내 기준으로는 엄청 늦게 일어난 건데, 그 와중에 몸은 또 천근만근이다.
재택근무 시작을 30분 앞두고 친구는 아침을 준비했다. 고소한 곡물빵, 쫀득한 식감이 신기한 발효빵, 그리고 일반 바게트를 차례로 구웠다. 버터는 물론 각종 잼까지 발라먹는 것도 한 가득이었다. 토스트 뷔페가 따로 없네.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갈색의 맥아빵(malt loaf)인데, 묵직하고 쫀득한데 떡이랑은 또 달라서 재밌는 식감이었다. 여기에 가염버터를 싹 발라먹으면 조합이 기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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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테이블에서 책도 읽다가, 일기도 쓰다가 하니 금세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으로는 치킨 대체육을 넣은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콩 단백질로만 만들었다는 'THIS ISN'T CHICKEN PIECES'는 식감이 약간 뻣뻣해도 맛이 좋아 인기가 많단다. 대체육이라고 건강에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관심도 있고 응원하고 싶은 분야라 마트에서 발견하자마자 냉큼 장바구니에 담아왔다.
요리는 친구가 했지만 나중에 따라 해보고 싶어 과정을 열심히 기록했다.
1. 삶은 푸실리에 토마토, 케일, 바질 등을 썰어 넣는다.
2. 에어프라이어에 살짝 돌린 대체육과 모차렐라 치즈까지 넣는다.
3. 바질페스토 세 숟갈, 올리브유, 소금과 후추 등을 넣고 대충 섞어준다.
20분 만에 뚝딱 완성한 건강 파스타!
익숙한 맛이라 더 좋았다. 바질페스토에 생 바질잎까지 넣으니 풍미가 정말 좋았다. 푸실리도 통밀이고, 야채도 듬뿍 들어갔으니 이보다 건강식일 수가 없다. 분명 대접에 한가득 담았던 것 같은데, 먹다 보니 또 다 먹어졌다. 친구한테 원래 이렇게 양을 많이 하냐고 물어봤는데 가족 중에서 본인이 제일 손이 작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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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은 소파베드와 한 몸이 되어 보냈다. 그러다 화창한 날씨에 집안에만 있는 건 여행자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급히 외출했다. 친구 집 주변엔 정말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다. 외국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2층짜리 벽독집들이 이따금씩 모여 있고, 그보다 훨씬 넓게 숲과 들판이 펼쳐져 있는 평화로운 동네다.
큰 마트에 가려면 30분은 걸어야 하는데, 그 시간이 참 좋다. 차도 사람도 없는 길을 앞만 보고 걷는다. 소음이라곤 바람과 새소리뿐인 산책길, 익숙한 것들로부터 디톡스 되는 기분이 꽤나 상쾌하다.
그렇게 대형 쇼핑몰 같은 곳에 도착했다. 우선은 스포츠용품점을 둘러보는데, 공간도 공간이지만 물건이 너무 많아서 흥미를 잃어버렸다. 창고형 매장에서 꿀템을 찾는 내공이 나에겐 없다...
그 옆엔 저렴한 대형 마트인 TKMAXX, 역시나 거대한 생활용품 창고 같다. 여기서 잘만 찾으면 몰스킨을 한국의 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살 수 있다. 나도 운 좋게 소프트커버 노트를 만원 조금 못 되게 사 왔다.
또 한 블록 옆으로 가면 MARKS&SPENCER가 나온다. 이마트와 백화점의 중간 정도에 포지셔닝되어 있는 듯한 영국의 대표적인 고급 마트. 자체 상품도 엄청 잘 되어 있다. 다른 덴 몰라도 여긴 꼼꼼히 구경해야지.
일단 빵 코너부터 둘러보자. 영국은 차 문화가 발달해서인지 빵도 종류가 참 많다. 내가 느끼기엔 스콘과 머핀은 원래 잘하고, 요 근래엔 크림 도넛으로 난리다. (영국의 온라인 잡지에서 읽은 글이긴 하지만) 노티드처럼 크림이 잔뜩 들어 있는 설탕 도넛은 영국 스타일이라는 얘기도 있다.
빵만큼은 아니지만 여행지에서 먹는 과자도 나라마다 비교해 보는 맛이 있다. 영국 하면 비스킷, 특히 버터나 초코맛은 못 참지. 짭짤이는 원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번에 소금식초맛 렌틸칩에 눈을 떴다.
PB 상품도 장난 아니다. 영국도 인플레이션으로 난리인 데다 파운드 환율까지 많이 올라서 저렴하진 않지만, 그래도 외식보다는 훨씬 낫지. 아, 치즈랑 요거트 같은 유제품은 확실히 좀 싸다!
퇴근한 친구도 합류해 열심히 장을 봤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용하고 평화롭다. 이런 날들도 일상이 되면 지루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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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가볍게(?) 새우 대체육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Happiee!'라는 또 다른 대체 식품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친구가 즉석으로 만든 타르타르소스에 얼음 맥주까지 준비 완료.
새우 대체육은 탱탱한 맛살 같은 식감에 은근 해산물 같은 맛도 나서 신기했다. 소스에 찍어먹으면 일반 새우튀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산물까지 대체 식품이 있다는 게 참 흥미롭다. 스펀지 같은 푸시시함이나 콩비지를 뭉쳐놓은 것 같은 퍼석함은 경험했어도, 탱글탱글한 대체육은 처음이네.
여기에 보다 만 <베이비 레인디어>를 틀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결말이 아주 속 시원하진 않다. 영국에 왔으니 영국 드라마를 봐야 한다며 골랐다가 방구석에서 심각해진 두 여성...
분위기 반전을 위해 술도 바꾸고 안주도 바꿨다. 스파클링 와인에 치즈 플래터라니, 완벽한 조합이다. 여기에 전날 본 뮤지컬이 눈에 아른거려 영화 <시스터액트>까지 재생했다.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 스토리도 음악도 흠잡을 곳이 없네. 뮤지컬도 재밌었지만 영화를 다시 보니 영화가 몇 수 위이긴 하다...!
그렇게 우린 기어코 2편까지 보고 나서야 하루를 마무리했다.
*덧붙임
밀가루 빵과 치즈를 먹었으니 온전한 비건식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채식은 추구했던 하루였습니다. (저는 초리조는 안 먹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