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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l 28. 2024

영국에선 일요일에 선데이 로스트를 먹는다죠?

2024년 5월 12일

영국 음식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선데이 로스트(Sunday Roast)'다. 말 그대로 일요일에 먹는 구이(roast) 요리인데, 푸짐하게 차려 먹고 다 같이 교회에 가는 전통에서 비롯된 가정식이란다. 얇게 썬 고기에 다양한 야채와 요크셔푸딩을 곁들이고, 각종 소스를 얹어 먹으면 된단다. 설명부터 맛있잖아. 


이왕이면 정통 영국식으로 제대로 먹어보자 싶어 찾은 곳이 'The Three Trees'라는 펍이었다. 커다란 가정집 같은 외관에 '이거지' 싶었다. 


내부도 정말 넓었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살짝 낡은 느낌이 나는 인테리어는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라 좋았다. 진정한 빈티지란 이런 것인가!


'일요일용' 메뉴는 따로 있었다. 한 장엔 식사가, 한 장엔 디저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친구와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선데이 로스트 2인분을 주문했다. 가격은 한 사람당 15파운드 정도이니, 우리나라 돈으로 2만5천원이다. 유로도 그렇고 파운드도 그렇고 환율이 참 많이 올랐다. 여행자는 서글프네...


아무튼, 이 펍의 선데이 로스트는 뷔페처럼 개인 접시에 원하는 만큼 덜어가면 된다. 직원분의 안내를 따라 선데이 로스트 코너로 갔더니, 고기부터 소스까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고기는 썰어주시는 분이 있었다. 노릇노릇 맛있어 보이는 고기 덩어리에 감탄하는 날 보더니 직원분은 활짝 브이를 그렸다. 내가 관광객임을 직감하셨군요. 


고기는 세 종류를 고르면 되는데 소, 터키, 돼지 뱃살을 선택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를 얇게 썰어 접시에 턱턱 얹어주는데, 약간의 투박함에 더 식욕이 돌았다. 사이드로 먹을 야채도 종류가 다양했다. 크림소스에 끓인 대파, 치즈에 버무린 컬리플라워, 매시드 포테이토, 구운 야채 등 선택지가 많아 행복했다. 이러면 고기도 많이 먹을 수 있지. 


소스에도 진심인 이곳. 그레이비도 두 종류인 데다 고기별로 곁들이는 양념도 다 다르다. 친구 말로는 소는 홀그레인 소스에, 돼지는 사과조림에, 터키는 크랜베리 콩포트에 찍어 먹는 게 정석이라고. 


그렇게 각자의 접시에 잔뜩 담아왔다. 고기와 야채도 좋지만, 선데이 로스트는 요크셔푸딩으로 완성된다. 둥그런 접시처럼 생긴 이 빵은 슈 반죽을 바구니 모양으로 튀겨 가벼운데 살짝 쫀득한 식감이 특징이다. 찢어서 그냥 먹거나 그레이비소스에 담가 축축하게 먹으면 된다. 


몇 년 전에 런던 시내에서도 선데이 로스트를 먹어봤는데, 이번이 훨씬 맛있었다. 고기도 엄청 부드럽고, 사이드도 갓 만들어 따끈따끈하니 좋았다. 토핑이 다양해서 양이 많아도 끝까지 질리지가 않았다. 


우리가 첫 손님이었는데, 먹다 보니 식당 안이 바글바글해졌다. 대부분이 가족 단위 손님이었고, 누가 봐도 이곳이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식사하니 정말 가정집에 초대되어 온 것 같았다. 


*

배부르게 식사한 뒤의 오후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친구네 동네는 런던 시내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근교 마을인데, 조용하고 평화롭다. 높은 건물 대신 숲과 공원으로 둘러싸인 이 동네는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 같고, 고민거리들은 조금씩 희미해진다. 


그래도 한 일이 있다면... 하나, 동네 고양이랑 놀기. 등은 까맣고 배는 하얀 이 무해한 생명체는 날 언제 봤다고 냅다 길에 드러누웠다. 둘, 기가 막히게 예쁜 풍경을 바라보며 러닝 하기. 달리기를 꽤나 좋아하는데, 서울에선 한강이나 가야 오랜 시간 야외 러닝을 할 수 있어 아쉽다. 이 동네는 마음만 먹으면 한 시간을 평탄한 인도에서 달릴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넷플릭스 보면서 와인 마시기. 마트에서 사 온 스파클링 로제 와인이랑 치즈 플래터를 세팅해 놓고, <베이비 레인디어>를 틀어놨다. 나는 한국에서 얼추 본 건데도 다시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트라우마가 형성되는 과정, 우울의 늪에서 헤매는 시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이보다 자세히 그릴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숙연한 분위기에서 홀짝 거리다 하루의 마무리로는 활기찬 게 좋겠다며 아이돌 무대를 이것저것 찾아봤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친구들... 한류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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