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영국에서의 날들이 시작됐다. 친구집에서 지내는 거라 시작부터 마음이 편안했다. 마침 토요일이었고, 친구도 일정이 없었다. 시간은 많은데 체력이 없네. 런던 시내로 나가지 않고 하루종일 친구 동네에서 늘어져 있기로 했다.
아침엔 친구가 좋아한다는 베이커리 카페에 갔다. 영국도 물가가 엄청 올랐는데 그래도 빵은 한국보다 싸다! 크루아상도 프레첼도 우리나라 돈으로 삼천 원대다.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라즈베리 크루아상과 소시지번을 주문했다. 커피도 있어야 하니까 플랫화이트도 추가.
소시지번엔 계란프라이와 다진 고기를 뭉쳐놓은 패티가 들어 있었다. 유럽에서는 길쭉하니 매끈하게 생긴 것도, 떡갈비처럼 다진 고기를 뭉쳐 놓은 것도 소시지라 부르더라. 오히려 좋아. 라즈베리 크루아상엔 상큼한 크림이 들어 있어 커피와의 조합이 좋았다.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가 식을 때까지, 빵 단면이 버석하게 마를 때까지 각자의 일에 몰입했다. 일기도 쓰다가, 책도 읽다가, 멍하니 바깥 구경도 하다가. 그렇게 오전을 평화롭게 보냈다.
*
오전은 실내에서 보냈으니 오후는 햇볕 아래서 놀아보자. 우선 리들(Lidl)에서 장을 잔뜩 봤다. 해외에서 조용하고 느긋하게 피크닉 즐기는 게 로망이란 내 말에 친구는 도시락을 준비했다.
친구는 두 가지 맛의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하나엔 연어와 크림치즈를, 다른 하나엔 모차렐라 치즈와 터키 햄을 잔뜩 넣었다. 여기에 한입거리 과일과 치즈까지 준비하면 피크닉 준비 끝!
친구 집에서 딱 5분만 걸으면 사방이 탁 트인 공터가 나온다. 빈틈없이 잔디가 깔려 있고, 가까이서 보면 희고 노란 들꽃들이 조롱조롱 피어 있다. 햇빛이 세진 않았지만 커다란 나무 앞에 돗자리를 폈다. 싸 온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고, 차가워서 겉에 물방울이 맺힌 와인병까지 싸악 닦아주면 먹기도 전에 기분이 한껏 들뜬다.
우선 바게트 샌드위치로 시작하자. 마트에서 사 온 바게트는 상태가 좋았다. 겉은 단단했지만 속은 보들보들해서 질긴 느낌이 없었다. 배는 살짝 채웠으니 핑계 좋게 축하주로 넘어가 볼까. 1년 만에 온 영국에서, 친구와 이렇게 마주 앉아, 화창한 날씨에 피크닉을 즐기는 이 순간. 쓰다 보니 충분히 축하할 일이다.
스파클링 와인의 보글보글한 거품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지금의 낭만이 오래 기억되길, 짠!
*
한참을 먹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잔디밭엔 우리밖에 없었다. 배가 부르니 움직임이 둔해졌다. 돗자리에 반쯤 누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세 지루해져 다시 수다의 늪에 빠졌다. 자세를 바꿔가며 당장 생각나는 것들에 대해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영화 <바비>에 대해, 독서 습관에 대해, 한국과 영국에서 각자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엔 '유로비전(Eurovision)' 무대를 쭉 틀어놓고 방구석 품평회를 열었다. 유로비전은 1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유럽의 국가대항 노래 경연 대회인데, 온갖 희한한 컨셉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올해는 크로아티아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쓰며 찾아보니 크로아티아가 준우승했단다! 나 꽤나 듣는 귀가 있나 본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은 크로아티아의 파이널 무대로 마무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