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제목이 그림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회화는 캠버스 위라는 2차원 공간 안에서 존재하지만, 나에겐 항상 조각보다 더 입체적이고, 사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보다가 캔버스 그 밖, 예상치 않은 곳에서 종종 감동을 받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림의 제목이 그림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그렇다.
Tate Britain Museum, 2019 봄
출장 차 방문한 런던. 업무가 시작하기 전 일요일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갔다가 왓츠(Watts)의 <희망 (Hope)>을 보고 많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눈물이 왈칵 나 서둘러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발을 옮겼다. 그림의 제목은 <희망>이지만, 아래 보다 시피, 사실 그림 자체는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그림 안에는 눈을 가린 여자가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구체 위에 앉아 줄이 끊어진 리라에 귀를 대고 있다. 하나 빼고 다 끊어진 줄을 가지고 무슨 음악을 하고 무슨 음을 듣겠다는 건지. 그래도 여자는 온몸을 구부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리라 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배경이며 구체까지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어두운 색감이 그림을 지배하고 있고 여자의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옷이 그녀의 구부린 등과 팔다리를 더 도드라지고 연약하게 보이게 한다.
그런데 왜 이 우울한 그림의 제목은 <희망>일까?
이렇게 우울하고 절망스럽기까지 한 이 그림의 제목은 왜 <희망>일까.
...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기댈 곳이 없을 때, 너무나 절박하고 절망스러울 때 남는 그 마지막 하나가 희망이기 때문일까. 포기하고 싶을 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이 희망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보통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부여잡은 "희망", 그 절절함이 느껴져서 속절없이 그 앞에서 눈물이 났다. 한 줄 밖에 남아있지 않은 리라를 꽉 움켜쥔 그 손과, 눈마저 가리고 온 정신을 집중해 그 남은 한 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세상의 많은 "희망"들 중에 이런 슬프고 절박한 희망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의 제목이, 그림이 주는 느낌대로 <우울한 리라 연주자>이거나 <절망한 여인>이었다면 사실 "우울을 잘 표현한 멋있는 그림이네"하고 지나쳤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제목이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림 자체가 주는 느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고 왓츠의 <희망>은 그렇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Art Institute of Chicago, 2018 겨울
회화 그림은 사진으로 볼 때와 직접 보는 볼 때 받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원화의 색감이 그대로 살아나는 사진은 보기 힘들 분더러, 색과 선만이 남는 엽서 사진과 달리 그림을 직접 볼 때는 붓의 속도,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반사되는 물감의 질감이 느껴진다. 램브란트(Rembrandt)의 <야경꾼(The Night watch)>이나 폴란드 국민화가 얀 마테이코(Jan Matejko)의 <그룬발드 전투(Battle of Grunwald)>같이 갤러리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그림들은 그 큰 캠버스 안에 가득 찬 색과 인물들이 역동성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그림이더라도 보통 한눈에 다 들어오는 컴퓨터나 핸드폰 모니터보다 그림 캠버스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림 앞에서 머물며 인물의 손짓, 시선, 표정 하나하나를 찬찬히 집중을 하며 음미할 수가 있다.
브르통(Breton)의 <종달새의 노래 (The Song of the Lark)>는 어느 미술관에서 화가 이름이나 작품 이름도 모르고 그저 그림이 주는 분위기가 좋아서 산 엽서로 눈에 먼저 익숙해진 작품이었다. 그러다 몇 년 후 시카고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우연히 직접 보게 됐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그림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는데 직접보게 된 그림이 엽서 사진보다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 느끼지 못했던 어둠에 싸여있는 대지와 붉게 불타오르는 해의 대조. 목가적 풍경을 뒤로하고 서 있는 소박한 차림의 소녀. 자연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그들의 신성한 노동이 불어 일으키는 그 순수한 아름다움이 너무나 강렬히 느껴졌다.
한참을 이리저리 보는 각도를 바꾸며 캠버스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제목을 확인 했는데 <종달새의 노래>라는 그림 제목을 보자마자 짧은 소설을 순식간에 읽은 듯 그림 위에 서사가 덧붙여졌다.
그 순간을 더 특별히 만든 건, 그림의 제목 <종달새의 노래> 였다.
사실 그림 <종달새의 노래> 안에 종달새는 없다. 노래를 상징하는 어떤 은유물도 없다. 하지만 <종달새의 노래>라는 그림의 제목을 본 순간, 소녀가 밭고랑 사이를 걸어가다 멈춰 서서 듣고 있는 그 종달새를 같이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걷다가 그대로 멈춘 듯 살짝 들려진 뒤꿈치와 집중해서 듣느라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입. 캠버스 너머 있는 숲의 어둠 사이로 종달새를 찾고 있는 듯한 시선. 그 모든 것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신발도 신지 않고 허름한 옷을 입고 이른 아침부터 혹은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소녀의 하루에 종달새의 노래가 들려온 그 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종달새의 노래> 그림 자체도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림의 제목 덕분에 그림을 보는 그 이상의 경험을 하게 된 특별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