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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 Oct 18. 2021

그림의 제목

그림의 제목이 그림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회화는 캠버스 위라는 2차원 공간 안에서 존재하지만, 나에겐 항상 조각보다 더 입체적이고, 사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보다가 캔버스 그 밖, 예상치 않은 곳에서 종종 감동을 받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림의 제목이 그림 그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그렇다.




Tate Britain Museum, 2019 봄

출장 차 방문한 런던. 업무가 시작하기 전 일요일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갔다가 왓츠(Watts)의 <희망 (Hope)>을 보고 많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눈물이 왈칵 나 서둘러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발을 옮겼다. 그림의 제목은 <희망>이지만, 아래 보다 시피, 사실 그림 자체는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그림 안에는 눈을 가린 여자가 허공에 떠 있는 듯한 구체 위에 앉아 줄이 끊어진 리라에 귀를 대고 있다. 하나 빼고 다 끊어진 줄을 가지고 무슨 음악을 하고 무슨 음을 듣겠다는 건지. 그래도 여자는 온몸을 구부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리라 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배경이며 구체까지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어두운 색감이 그림을 지배하고 있고 여자의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옷이 그녀의 구부린 등과 팔다리를 더 도드라지고 연약하게 보이게 한다


그런데 왜 이 우울한 그림의 제목은 <희망>일까? 


Hope (1886) George Frederic Watts 

이렇게 우울하고 절망스럽기까지 한 이 그림의 제목은 왜 <희망>일까. 


...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기댈 곳이 없을 때, 너무나 절박하고 절망스러울 때 남는 그 마지막 하나가 희망이기 때문일까. 포기하고 싶을 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이 희망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보통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부여잡은 "희망", 그 절절함이 느껴져서 속절없이 그 앞에서 눈물이 났다. 한 줄 밖에 남아있지 않은 리라를 꽉 움켜쥔 그 손과, 눈마저 가리고 온 정신을 집중해 그 남은 한 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세상의 많은 "희망"들 중에 이런 슬프고 절박한 희망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의 제목이, 그림이 주는 느낌대로 <우울한 리라 연주자>이거나 <절망한 여인>이었다면 사실 "우울을 잘 표현한 멋있는 그림이네"하고 지나쳤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제목이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림 자체가 주는 느낌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고 왓츠의 <희망>은 그렇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Art Institute of Chicago, 2018 겨울

회화 그림은 사진으로 볼 때와 직접 보는 볼 때 받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원화의 색감이 그대로 살아나는 사진은 보기 힘들 분더러, 색과 선만이 남는 엽서 사진과 달리 그림을 직접 볼 때는 붓의 속도,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반사되는 물감의 질감이 느껴진다. 램브란트(Rembrandt)의 <야경꾼(The Night watch)>이나 폴란드 국민화가 얀 마테이코(Jan Matejko)의 <그룬발드 전투(Battle of Grunwald)>같이 갤러리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그림들은 그 큰 캠버스 안에 가득 찬 색과 인물들이 역동성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까지 크지 않은 그림이더라도 보통 한눈에 다 들어오는 컴퓨터나 핸드폰 모니터보다 그림 캠버스가 훨씬 크기 때문에 그림 앞에서 머물며 인물의 손짓, 시선, 표정 하나하나를 찬찬히 집중을 하며 음미할 수가 있다.

The Song of the Lark (1884) Jules Adolphe Breton

브르통(Breton)의 <종달새의 노래 (The Song of the Lark)>는 어느 미술관에서 화가 이름이나 작품 이름도 모르고 그저 그림이 주는 분위기가 좋아서 산 엽서로 눈에 먼저 익숙해진 작품이었다. 그러다 몇 년 후 시카고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우연히 직접 보게 됐다.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그림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는데 직접보게 된 그림이 엽서 사진보다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 느끼지 못했던 어둠에 싸여있는 대지와 붉게 불타오르는 해의 대조. 목가적 풍경을 뒤로하고 서 있는 소박한 차림의 소녀. 자연에 기대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그들의 신성한 노동이 불어 일으키는 그 순수한 아름다움이 너무나 강렬히 느껴졌다. 


한참을 이리저리 보는 각도를 바꾸며 캠버스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제목을 확인 했는데 <종달새의 노래>라는 그림 제목을 보자마자 짧은 소설을 순식간에 읽은 듯 그림 위에 서사가 덧붙여졌다. 

그 순간을 더 특별히 만든 건, 그림의 제목 <종달새의 노래> 였다. 


사실 그림 <종달새의 노래> 안에 종달새는 없다. 노래를 상징하는 어떤 은유물도 없다. 하지만 <종달새의 노래>라는 그림의 제목을 본 순간, 소녀가 밭고랑 사이를 걸어가다 멈춰 서서 듣고 있는 그 종달새를 같이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걷다가 그대로 멈춘 듯 살짝 들려진 뒤꿈치와 집중해서 듣느라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입. 캠버스 너머 있는 숲의 어둠 사이로 종달새를 찾고 있는 듯한 시선. 그 모든 것이 이어져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신발도 신지 않고 허름한 옷을 입고 이른 아침부터 혹은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소녀의 하루에 종달새의 노래가 들려온 그 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종달새의 노래> 그림 자체도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림의 제목 덕분에 그림을 보는 그 이상의 경험을 하게 된 특별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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