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이 된 한국, 갈라테이아가 된 소녀상
피그말리온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다. 키프로스 섬의 여성들은 나그네를 박대했다는 이유로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나그네에게 몸을 팔게 되었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이 해안으로 나가 나그네에게 몸을 팔고 그 화대를 받아 본인의 결혼 자금을 마련하는 기구한 운명 형벌에 처해진 거다. 피그말리온은 이런 여성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여성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피그말리온은 독신으로 지내리라는 다짐을 하고 상아로 여성상을 조각한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한, 숭고한 여성상을 조각한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조각상에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입을 맞추는가 하면 옷도 갈아입히다가 탄식을 토하기도 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축제날.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에게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조각상, 즉 갈라테이아라 이름 붙인 여성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진짜 여자'로 변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고, 곧장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그의 집에 자신의 아들인 에로스를 보내 조각상의 손에 입을 맞추게 한다. 그러자 갈라테이아의 손에 반지가 생겼고, '진짜 여자'로 변한 갈라테이아는 피그말리온의 아내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이어갔다.
이 신화를 해석하기 위해 역사를 뒤적거려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1600년 경에 그리스인들 중 일부가 키프로스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1100년 경부터는 그리스인들의 대거 유입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았다가 기원전 700년 경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500년 경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다시 알렉산드로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완전히 헬레니즘화 된다. 그리스 신화라는 것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돼 헬레니즘과 로마제국을 거치며 살이 붙었으니 지역의 역사와도 맞물려있을 게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키프로스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외지인, 즉 그리스인들이 이 품었던 이 섬에 대한 환상을 보여준다고 해석된다. '그곳 여자들은 예쁘다'는 환상. 마치 '대구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다'는 환상과도 같은 것. 키프로스는 그리스인들의 욕망이 향한 섬이었으리라. 외지인이 이따금 키프로스에 갈 일이 있거든 여성들을 성적으로 유린했을 테고, 이곳의 여성들 혹은 사람들은 외지인을 경계했을 테다. 아프로디테의 저주는 그리스 중심의 세계관에서 이 키프로스의 여성들을 대상화한 끝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싶다.
아프로디테가 하필이면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을 골라 몸을 팔도록 만드는 저주를 내렸다는 건 그리스 중심의 세계관에서 지배 도시와 피지배 도시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고도 해석된다. 여기에 여성의 정조 관념 따위가 함께 반죽되어 진정 아름답고 진정 순수한 여성이 남성에 의해 창조된다는 내용이 덧붙여진 거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로서, 유일한 주인에게 귀속될 때 가장 숭고해진다는 내용의 신화다. 이렇게 피그말리온 신화는 여성 혐오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해석은 다분히 내 주관적 해석이지만, 한국 남성들이 필리핀에 가서 코피노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비슷한 문제들이 당시에 얼마든지 있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으로부터 피그말리오니즘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는데, 피그말리오니즘이란 현실로부터 도피해 혼자 고립되어 자신의 원망을 투사한 가상의 이상적 존재에 집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21세기에, 아주 정확히 피그말리오니즘의 현상들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소녀상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군이 설치한 위안소로 끌려가 성폭력을 당한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이 모뉴먼트 조각상은 다분히 여성혐오적이다. 일본군이 조선의 '소녀'를 데려가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메시지의 이면에는 소녀에 대한 대상화와 여성의 순결에 대한 한국 사회의 환상이 얽혀있다. 왜 하필이면 소녀의 형상으로 만들어야 했는가, 이 모뉴먼트를 제작한 작가에게 그런 고민은 없었는가 따위의 유의미한 비평은 좀처럼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인 대부분이 소녀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어느날 갑자기 피그말리온이 되어버렸고, 소녀상은 그날부터 갈라테이아가 되어버렸다. 이제부터 소녀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스러운 지위를 발산한다. 겨울이 되면 소녀상에 털모자를 씌우거나 목도리를 두르고, 비가 오는 날이면 우의를 입히거나 우산을 씌운다. 심지어 미세먼지가 심한 날엔 KF94 등급의 마스크를 씌운다.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의 또다른 문제는 실존하는 피해자를 압도한다는 것.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조각상에 투사한 욕망은 반대로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투사한 욕망인데,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투사한 욕망이 고스란히 소녀상에 맺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실제 여부와 아무런 관계 없이 소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일련의 콘텍스트를 읽어내면, 소녀상의 등장과 한국인의 피그말리오니즘은 그 자체로 불행을 유통시킨다.
나는 농담삼아 "박정희 흉상은 훼손됐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곤 한다. 이미 박정희와 관련된 모뉴먼트들은 신화화가 완성된 상태다. 그러므로 박정희 흉상은 단 한 번도 훼손된 적이 없다. 그건 지상의 인간이 훼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체 훼손 행위가 절대로 신을 훼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21세기의 인간이 어떤 것의 신화화를 막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동일한 관점에서 소녀상이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뛰어넘어 신화화 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과연 현대의 미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가? 한국인들을 피그말리온으로 만들고 사회를 피그말리오니즘에 빠지게 만든 작가에게, 이지경이 될 때까지 제대로된 비평을 가하지 않은 식자층에게, 그저 이 신화의 조각상을 끌어안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수많은 위정자들에게 다시 한국 사회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란다. 아무도 지난 100년에 대해 똑바로 이야기하자고 대들지 않는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지난 100년은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인가? 도대체 한국 사회는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 것인가?